자연 풍광을 그린 것을 풍경화라고 한다. 서양미술에서 풍경이 제대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화가들이 풍경에 관심을 가졌지만 대개는 배경의 역할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풍경화’라는 제대로 된 배역을 맡겨준 건 낭만주의 미술가들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현상을 주목했다. 이를테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라든지 장엄한 노을이나 검은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햇살, 혹은 깎아지른 절벽에서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 등. 이런 것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동양에서는 풍경화라고 부르지 않고 ‘산수화’라고 말했다. 산과 물 같은 자연을 다루었으니 풍경인 셈이다. 산수화의 역사는 대략 1600여 년에 이른다. 그 오랜 세월 무수한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렸던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풍경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동양의 화가들은 풍경을 통해 시대, 사상, 자연 이치, 개인사, 자연의 장엄함 같은 것을 담아냈다. 이를 두고 ‘뜻을 그린다’라고 했다.
설민기도 풍경을 다룬다. 평범한 경치지만 의미가 스며들어 있다. 어떤 뜻을 담았을까.
그는 전통적 꽃담을 배경으로 소복하게 눈을 맞고 앉은 장독대나 정겨운 숲 속에 둘러싸인 이국적 풍경의 마을 혹은 자작나무 숲 같은 따스함이 묻어나는 풍경을 그린다. 그런데 이런 풍경에서 아련한 향수가 피어오른다. 마치 오래전 고향 마을에서 느꼈던 그리움이나 여행 중에 마주친 낯선 마을의 추억 같은 정서다. 어떻게 이런 느낌을 연출하는 것일까.
기억 저편의 아스라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색채의 눈높이를 중간쯤에 맞추어 놓았다. 원색에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난 중간 톤 색채 조합이 보여주는 풍경은 오래전 외국 친구로부터 받은 빛바랜 그림엽서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서는 아련한 추억이 묻어난다. 배경에다 이런 풍경을 깔아 놓은 작가의 속마음은 어떤 것일까. 아름답게 남아 있는 자신의 유년 시절 추억을 얘기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리움이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집에 대한 기억이거나, 할머니에 대한 아련한 정서 같은 것.
특별할 것 없는 풍경에서 어떻게 이런 느낌이 나올까.
설민기는 전통 옻칠 기법으로 작업을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달걀껍질이나 조개껍질 등 자연 재료가 등장한다. 옻과 안료를 섞어 만든 자신만의 색채로 모든 작품을 제작한다. 이런 방법이 독특한 느낌을 연출하는 것이다. 특히 옻칠 색감이 주는 은은한 느낌과 깊이 있는 울림이 아련한 그리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노하우다. 전통 기법으로 공들여 익힌 옻칠 공예 기법이 설민기식 회화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