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양 날개에 불법 자금 ‘무거운 추’
▲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왼쪽)이 2010년 1월 27일 충남도지사 출마 출정식을 했다. 안 최고위원이 선전을 다짐하며 이광재 의원과 손을 잡고 만세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
▲ 2003년 12월 14일 안희정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 불법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됐다. |
안희정은 1989년 민주당 김덕룡 국회의원실에서 정치권에 발을 내딛는다. 다음해 3당 합당이 이뤄졌는데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7인이 합당을 거부하며 꼬마 민주당을 결성하자 안희정은 거기에 따라 남는다. 이광재·유시민 등과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어울린다. 이후 정치권을 떠난 안희정을 이광재가 찾아간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자.”
둘은 1992년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노무현을 돕기 시작했고, 1994년 6월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희정이 사무국장을 맡는다. ‘실무’라는 단어는 노 전 대통령이 넣었다. 희정은 이후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 캠프에서 정무팀장을 맡았고, 노무현과 관련된 모든 ‘자금’을 관리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된 뒤 안희정은 곧바로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된다. 노무현 캠프에서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안희정이 대선을 전후해 불법자금 27억 원을 모아썼다는 의혹이 일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교동계 한 의원은 “안희정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노 대통령 측근 실세라고 하더라. 실세는 이슬 맞은 나팔꽃 같아서 이슬이 말라버리면 끝장”이라고 그를 겨눴다. 안희정이 동교동계를 기득권자로 표현한 것이 논란이 된 것이다.
당시 민주당 구주류 측은 “안희정이 차와 집을 바꾸고 고급 술집을 빈번히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다”고 공격했다. 안희정은 “부천의 40평 아파트에서 일산의 40평 아파트로 옮긴 것이고, 쏘나타 타고 다녔는데 친구 몇 명이 희정이 차 한 대 사주자. 그런데 희정이 이름으로 하면 또 말이 나오니 친구 회사 명의로 해주자고 해서 SM5 빌려 타고 다닌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논란이 확대됐고 안희정은 결국 2003년 3월 24일, “국민의 질책을 받아들이고 자기 반성할 부분에 대해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 승용차를 친구들에게 되돌려 주기로 했다”고 밝힌다.
안희정은 본격 선거전이 시작되던 2002년 11월 중순부터 12월 하순까지 성명불상자 43명으로부터 불법자금을 받는다. 당시 민주당 선대위에도 공식 자금모금 창구가 있었지만 안희정은 은밀하게 돈을 받았다. 17억 4000만 원은 여의도 새천년민주당 8층 정무팀 사무실과 민주당사 인근 금강빌딩 사무실에서 43차례 걸쳐 각기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다.
3000만 원까지 작은 돈은 사무실에서, 1억 이상 큰돈은 자치경영연구소(경선 당시 노 후보의 사무실)가 있던 금강빌딩에서 받았다. 안희정은 이외에도 대선자금 명목으로 기업 세 곳에서 10억 원의 추가 불법자금을 받았다.
‘개인유용’ 문제가 나온 것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의 조카 계좌에 맡겨둔 불법자금 10억 중 1억 6000만 원을 2003년 2월 경기 고양시 일산 아파트 중도금 용도로, 같은 해 6월 총선출마 지역구 여론조사 비용으로 3억 1000만 원 등 4억 7000만 원을 썼다고 검찰에서 진술했기 때문이다.
안희정은 또 2003년 8월 부산 지역 건설업체 B 사 K 사장으로부터 2억 원을 받는다. 이 시점은 안 씨가 나라종금 등에서 불법 정치자금 3억 9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두 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된 끝에 불구속 기소된 직후였다. 안희정이 대범하다는 소리가 그때 나왔다. 안희정은 나라종금 사건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돼 찜찜한 생각에 2억 원 중 1억 원은 돌려주고 나머지 1억 원은 출마 예정지역인 충남 논산계룡금산 지역 여론조사 및 사무실 임대료로 사용했다. 여기서 웃지 못할 일이 생긴다.
안희정은 아무개 씨를 통해 K 사장에게 현금 2억 원을 돌려준다. 이 인사는 2억 원을 실은 차에 K 사장을 태우고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K 사장 아파트까지 데려다 준다. 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이 인사가 각각 1억 원씩 든 쇼핑백 두 개를 전달하던 중 손잡이가 뜯어지면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쇼핑백 하나가 터진다. K 사장은 쇼핑백 하나만 들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당황한 이 인사는 돈을 그대로 들고 온다. 안희정은 도로 가져온 이 인사를 혼내면서도 그 돈을 그냥 받는다.
2002년 12월 롯데그룹은 노 후보 캠프에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창구는 안희정이었다. 6억 원을 현금으로 수차례 걸쳐 건넸고 받았다. 삼성도 대선 당시 안희정에게 채권 15억 원과 현금 15억 원 등 30억 원의 불법자금을 건넸다. 태광실업 등도 9억 5000만 원을 준 것으로 확인됐다.
안희정은 2003년 12월 구속 수감돼 2004년 12월 꼬박 1년을 채워 복역한다. 그 이후 금고형 이상이 확정된 사람에 대해서는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법에 따라 5년간 공직선거에 출마할 수는 없게 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자금 수사 정국에서 시달리던 안희정을 가리켜 “안희정은 나의 측근, 동업자요, 동지…나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노무현의 측근 중 안희정만 구속됐고, 그에 따른 노 대통령의 애정은 말도 못할 지경이라는 말이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출소한 안희정과 그의 아내를 청와대로 불러 위로했다. 2005년 한 월간지 조사에서 정치부 기자들이 권부에서 밀려난 안희정을 ‘파워맨 5위’로 지목한 것도 안희정이 그만큼 왼팔로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안희정은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거침이 없다. 2003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다. 안희정은 생수회사 장수천에 들어갔다는 나라종금 자금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4년 전 노무현, 안희정에게 누가 뇌물을 갖다 줘요? 불과 1년 반 전 후보 경선을 앞두고도 한 푼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요. 내 인생을 신뢰하는 사람(김호준 나라종금 회장의 동생 김효근 씨)이 준 돈이고, 내 사업에 투자받은 돈이에요. 사업하면서 누구든 돈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 취임 이후 내가 단 한 푼이라도 돈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밝혀 처벌해 달라는 겁니다.”
▲ 2009년 3월 26일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된 이광재 의원이 서울구치소로 이동하고 있다. |
이광재의 할아버지 형제 자식들이 6·25를 전후해 좌익 활동을 하는 바람에 이광재 집안은 연좌제로 허우적거렸다. 책벌레였던 그는 이웃집에서 책을 빌려 읽었고 작가의 꿈도 꾼다. 시바 료타로의 <제국의 아침>을 읽고 이광재는 ‘유능한 정치가가 한 나라를 얼마나 부강시킬 수 있는가’ 깨닫게 된다. 1988년 노무현 의원 보좌진을 맡으면서 정치권에 입문한 그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기획팀장,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 팀장을 거쳐 2003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이후 재선 의원이 된다.
국정상황실장 시절 이광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를 향해 모두가 ‘노무현의 분신’이라고 이야기할 때다. 대통령과 자주 만났고, 분야에 제한 없이 대통령의 미션을 수행했다. 실장은 2급 비서관이다. 청와대에는 1급이나 수석비서관, 보좌관 등 2급보다 높은 직책이 수십 가지였다. 직제로 보면 이 실장은 수십 명의 비서관 중 그냥 한 사람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15년 지기’라는 이력, ‘노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타이틀, ‘눈물 흘리는 노무현, 기타 치는 노무현’을 만든 미디어 선거의 1인자는 노 대통령이 각종 난제에 처할 때마다 해법을 내놓는다.
국정상황실은 대통령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국정을 둘러싼 각종 정보기관의 보고를 취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보통 A4 용지 3~7장 분량의 ‘상황과 동향’을 올렸다. 이 실장은 청와대 수석회의와 국무회의에도 2급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배석했다.
과거 정권에선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주례 회동이 이뤄졌는데 노무현 정부에서 주례 회동이 폐지된다. 국정원의 기능 축소는 곧 국정상황실의 기능 확대로 이어진다. 청와대 직제표상 국정상황실의 위상은 독특했다. 경찰 파견인력 5명 외에 국무조정실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산업자원부 중앙인사위원회 해양수산부 국정홍보처 등 주요 부처를 망라해 부이사관 또는 서기관급으로 파견자를 받았다. 대통령의 지시사항과 부처의 정책 진행상황을 크로스 체크하는 임무였는데 쉽게 말해 ‘암행 모니터’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단일 비서관이 거느리는 인원(30여 명)으로는 청와대에서 가장 많았다. 정보가 있는 곳에 권력이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실장 역시 집권층 내부에서 끊임없는 견제의 대상이 됐다.
이광재는 당선자 비서실 기획팀장에서부터 참여정부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식 백악관 모델을 본떠 청와대의 부처별 소관수석제를 폐지한 것도 그의 작품. 이광재는 인수위 분과 차원의 공모 작업과 별도로 조각 단계에서부터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부처별 장관 후보 적임자 리스트를 만들어 당선자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비서실 직원이 장관감을 골라 앉힌 셈이다.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상징하는 세대교체형 관료 중용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 행정관 인선에도 노무현 사람 중 386이 약진하고 유종필 이충렬 윤석규 등 70년대 학번이 모두 탈락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83학번 이광재가 선배 대하기가 껄끄러워서 그런 것 아니었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한자리 하려면 이광재 줄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퍼졌다. 각 부처 소관수석제도를 폐지함에 따라 청와대의 내각 장악력이 떨어진 가운데 생긴 공백을 국정상황실이 부분적으로 메우는 모습이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에 이 실장이 각종 인사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은 공공연히 나돌았다. 법조계에는 이 실장 출신인 연세대 인맥이 약진하고, 청와대와 정부 각 부처에 이른바 ‘이광재 맨’이 포진하게 됐다. 이 실장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는 비판으로 청와대를 떠난 뒤에도(2003년 10월 18일) 그의 인맥과 정보력은 그대로 유지됐을 정도다. 혹자는 이광재를 두고 “DJ 정부 4년차 박지원”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중순, 한 사석에서 이광재를 두고 “때로 불안해 보이지만 기획력과 아이디어가 탁월한 후배”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광재는 2002년 12월 대선 당시 썬앤문 문병욱 회장으로부터 1억 원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 이광재가 문 회장을 만난 여의도 63빌딩 자리에는 당시 노 후보와 썬앤문 김성래 부회장이 동석했고, 노 후보가 자리를 뜨고 난 이후 문 회장은 이 씨에게 1억 원을 전달했다고 한다. 노무현이 그 자리에 있었느냐의 여부가 진실공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8년 박연차 게이트 의혹에서 이광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2009년 3월 21일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검찰에 소환된 뒤 3월 26일 구속됐고, 구속 중에 민선 강원도지사에 당선됐다. 하지만 2011년 1월 27일 대법원에서 원심의 징역형을 확정판결하면서 강원도지사직을 상실했다.
안희정 이광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양쪽 날개였지만, 둘 다 불법자금 수수의혹으로 영어의 몸이 된 전력 때문에 2인자로서의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최기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