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마지막 구조본’ 사라진다
▲ 김승연 한화 회장과 금춘수 신임 경영기획실장. | ||
예전 한화 구조본이 기획, 지원, 구조조정(대한생명1,2팀 포함), 홍보, 법무, 총무의 8개 팀제였다면 경영기획실은 투자운영, 전략홍보, 법무의 세 곳으로 나뉜다.
2005년 초 구조본 해체를 선언한 삼성그룹이나 2003년 구조본을 해체한 SK그룹은 경영권 승계과정에서의 문제나 분식회계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분위기 전환을 위해 조직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한화의 구조본 해체는 분위기 전환용보다는 성장에 대한 위기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한화’하면 바로 떠오르는 업종이 없는 것처럼, 뚜렷한 업종 주도사업이 없는 가운데 차세대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신임 금춘수 경영기획실장은 재무나 전략통이 아닌 상사맨 출신이라는 점도 한화의 고민을 반영하는 인사로 풀이하고 있다. 한화 쪽에선 금 실장이 김승연 회장의 “글로벌 경영을 뒷받침할 적임자”라고 밝히고 있다.
한화의 변신은 올해 초부터 꾸준히 진행돼 왔다고 한다. 최근에는 외부인 접견을 사무실이 아닌 접견실에서만 하도록 출입시스템을 바꾸는 등 보안을 강화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내부에서는 ‘삼성 따라하기 아니냐’는 반응도 있지만, 한화 측은 “구조본 해체는 이미 예고됐던 것이다. 외환위기 때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계열사들의 자율경영을 보장해준다는 의미가 크다”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한화 구조본은 그간 한화바스프, 한화에너지를 매각하고 대한생명, 신동아화재를 인수하는 등 한화그룹의 굵직한 구조조정을 이끌기도 했었다.
이런 변화를 통해 내년부터는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또 최근에는 CI를 새로 만들고 간판과 명함 등 800여 개에 이르는 물품의 디자인을 변경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화약회사 이미지를 탈피하고 소비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계열사 중 ‘한화’ 사명이 붙지 않았던 갤러리아백화점을 한화갤러리아로, 신동아화재를 한화손해보험으로 바꿨다. 대한생명은 브랜드인지도 때문에 사명을 그대로 유지했다.
글로벌 경영을 선포했지만 글로벌화가 가능한 업종 선정이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한화는 3대 성장동력으로 화학, 금융, 레저·유통을 꼽고 있다. 금융과 레저·유통은 내수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해외진출이 힘든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한화는 “금융의 경우 브릭스(BRIC’s) 등에 진출이 가능하고, 레저·유통도 가능할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금융의 경우 대한생명이 업계 2위지만, 한화손보(옛 신동아화재)의 경우는 대한생명 매각 때 함께 매입하는 조건으로 산 것으로 업계 상위권은 아니라고 한다. 대한생명은 인수과정 문제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지만 최근 외환은행 매각과정에서 불거진 국부유출 논란이 오히려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리조트 사업은 한화가 국내 1위로 꼽히지만 유통의 경우 신세계와 롯데 등 워낙 쟁쟁한 업체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한화는 “현재 압구정동, 수원, 대전에 3개의 갤러리아백화점이 있는데, 특화된 서비스로 틈새를 파고들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현황을 설명했다. 대형유통업체로 키울 것인가라는 질문엔 “할인점 진출과 같은 방식은 아니다”고 답했다.
석유화학의 경우도 첨단소재 개발을 통해 고부가가치 사업을 키울 계획이다. 현재 화학은 해외매출 비중이 20%가량으로 해외진출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자동차 범퍼의 소재, 휴대폰이나 노트북의 접히는 부분에 들어가는 연성기판 등 소비자들에게 보다 가까이 있다는 이미지메이킹도 병행할 예정이다.
“장치산업의 하드한 인식을 소프트하게, 중후·장대한 이미지를 간소화하려는 의도가 새로운 CI에 담겨 있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3개의 원을 이용한 로고와 부드러운 서체의 글자를 채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고 한화 측은 전하고 있다.
한편 현재 도급순위 10위의 건설사업도 키울 계획이다. 지난해 대우건설 입찰에 참여했다 초기에 고배를 마시기도 했지만 좋은 인수대상이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고려할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당장은 인수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덩치키우기 위주의 성장전략이 아닌 내실 위주로 가다 보니 계열사들의 자율경영이 중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분간은 신수종 사업보다는 인수한 대생의 뿌리내리기와 기존 사업부의 강화에 더 힘을 쏟을 것이란 얘기다.
한편 한화의 구조본 해체가 지주사 체제로 바꾼 LG그룹의 예처럼 지주사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을 중심으로 (주)한화가 지주사가 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것.
그러나 한화 측은 “우리가 공식적으로 지주회사 설립을 얘기한 적은 없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지주사 설립을 권고하고 요건을 완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 단위의 자금이 필요한 데다, 일반지주회사와 금융지주회사를 구분하는 문제도 있다 보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며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해부터 줄곧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다. “현실에 안주하는 텃새가 되기보다는 멀리 날아다니는 철새가 되자”는 ‘철새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이는 2005년 말~2006년 초에 반영, 최고경영자 외부 영입, 대폭적인 임원급 물갈이 인사 등을 통해 임원급 평균 연령이 열 살 내려가는 등 변화의 고삐를 죄었다. 이어 지난 2006년 말 인사에서도 계열사 대표이사 6명이 교체되고 구조본 해체 등 김 회장의 변화된 경영 패러다임의 구체화가 계속되고 있다. 대형 매물(대한생명) 인수 후 성장과 정체라는 갈림길에서 김 회장의 새로운 리더십이 어떤 성과를 내놓을지 주목받고 있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