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아파트 전기차 지하주차 금지 주민투표까지…“과충전 예방 기능만 도입해도 화재 충분히 줄여”
#주차 중이던 차에서 불길이…
지난 1일 인천 서구 청라국제도시의 A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당시 CC(폐쇄회로)TV 영상에는 지하주차장에 있던 B 씨의 벤츠 EQE 350 전기차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다가 폭발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 모습이 담겼다. 소방당국은 다량의 연기 분출과 비좁은 지하주차장의 특성에 따라 진입에 어려움을 겪다가 8시간 20분 만에 완전히 불을 껐다.
이 불로 주민 22명과 소방관 1명 등 모두 23명이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차량 40여 대가 불에 타고 100여 대는 열손과 그을림 피해를 봤다. A 아파트 주민들은 단전·단수로 무더위 속 큰 불편을 겪었다. 사고 당시 화염으로 지하주차장 내부의 온도가 1500℃까지 치솟으면서 전기 설비와 수도 배관 등이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아파트 인근 임시주거시설 10곳에서 지내고 있는 이재민은 8월 6일 기준 264세대 822명이다. 현재 수도 복구는 마친 상태이며, 약 480세대에는 8일 현재까지도 전기 공급이 중단된 상태다.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해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5일부터 합동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전기차 화재 원인은 크게 과충전과 배터리 셀 불량이다. 배터리 셀 불량의 경우 품질 자체 문제도 있지만, 차량 운행 과정서 과속방지턱을 넘는 등의 충격이나 장마철 부분 침수 등이 배터리 셀의 내구도를 떨어뜨렸을 가능성이 있다”며 “문제는 전기차 배터리 화재 발생 시 고열에 의해 배터리 셀이 모두 녹아버리기 때문에 화재 원인을 정확하게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배터리 설계나 제작 결함 가능성이 높다”며 “다만 배터리 셀 결함 없이 덴트라이트(전지 음극 표면에 쌓여 만들어지는 나뭇가지 모양의 결정체) 현상으로 화재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차량이 충전 중인 상태가 아니더라도 덴트라이트가 서서히 커질 수 있으며, 배터리 분리막에 구멍을 내 양극과 음극이 만나 합선을 유발할 수 있다. 덴트라이트 현상은 결국 배터리 노화로 인한 것인데, 배터리 제조업체의 기술력에 따라 노화가 속도가 다르다”고 말했다.
폭발이 발생한 벤츠 EQE 350 차량에는 품질 문제가 불거졌던 중국 파라시스 테크놀로지(점유율 1.8%)가 생산한 제조사의 배터리 셀이 탑재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번 화재 원인이 ‘배터리 품질 불량’에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에너지 밀도는 떨어지지만 안정성은 뛰어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와 달리 중국산 삼원계 배터리는 기술력과 품질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됐거나 판매 중인 전기차 가운데 중국계 삼원계 배터리를 탑재한 차량은 모두 수입차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관련 이호근 교수는 “삼원계 배터리는 LFP 배터리에 비해 화재 위험성이 다소 높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배터리를 사용하든 제조사의 기술력에 따라 혹은 화재 확산 지연시스템의 작동 여부에 따라 화재 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불이 난 전기차가 화재 발생 사흘 전부터 계속 주차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불이 난 전기차의 차주인 40대 남성 B 싸는 7월 29일 오후 7시 16분쯤 차를 주차한 뒤 운행한 적이 없다고 경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에서 불이 난 시점은 8월 1일 오전 6시 15분쯤으로 주차한 지 59시간 뒤 갑자기 화재가 발생한 셈이다.
이를 두고 “사흘 동안 가만히 세워둔 차에서 어떻게 불이 났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이 현장 CCTV를 분석한 결과 B 씨가 마지막으로 주차를 하고 불이 나기까지 차량에 외부 충격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소방 관계자는 “화재 당시 해당 전기차는 충전 구역이 아닌 일반 주차 구역에 주차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배터리 내부에서 분리막이 손상된 경우 운행이나 충전 중이 아니더라도 불이 날 수 있으며 전기차 화재 사건의 상당수가 주차 중인 차에서 발생했다”고 말한다.
화재 발생 시 초기 진화에 도움을 주는 스프링클러가 미작동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소방당국은 현장 CCTV와 목격자 진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발화 지점을 중심으로 스프링클러가 작동한 사실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내연기관 차량과 달리 전기차는 한 번 불이 나면 온도가 급격히 오르는 ‘열폭주’ 현상이 발생해 진화가 어렵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지하주차장과 동일한 환경에서 실험을 통해 지난 5월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프링클러만 정상 작동하면 적어도 전기차 화재가 인접 차량으로 옮아 붙는 것을 막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전기차 포비아’ 극복 가능할까
이번 화재를 계기로 전국 곳곳의 아파트에서는 ‘전기차 지하주차 금지’를 두고 주민투표를 진행 중이다. 일부 지하주차장을 이용한 전기차에 경고장까지 붙이는 사례도 있었다. 전기차는 무조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전기차 포비아(공포증)’ 현상이 확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전기차 차주 김 아무개 씨(42)는 “전기차 탄다고 죄인이 되는 건가”라며 볼멘소리를 냈다.
전기차 포비아의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면서 화재 건수는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소방청에 따르면 전기차 화재는 2018년 3건, 2019년 7건, 2020년 11건, 2021년 24건, 2022년 43건, 2023년 72건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이 가운데 아파트를 포함한 다중이용시설의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는 2018년 0건에서 지난해 10건으로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극단적으로 전기차를 배척하기보다 소방 설비 등을 제대로 갖추는 대책이 더 시급하다고 말한다. 한국화재보험협회 등에 따르면 전기차량 화재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옥외에 전기차 충전 시설을 마련하는 게 가장 안전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이다.
김필수 교수는 “한국은 전기차 화재 위험에 있어 최악의 조건을 갖고 있다”며 “전기차 충전소를 지상으로 올리는 게 이상적이지만, 땅이 부족하다 보니 다중이용시설 주차장이 지하로 내려간다. 이는 화재 등 위급상황 발생 시 소방차 진입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과충전만 막아도 전기차 화재를 충분히 줄일 수 있다. 전기차 충전소가 자체적으로 완충을 막고 90% 이내로 충전할 수 있는 과충전 예방 기능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하주차장 내 스프링클러를 습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인천 A 아파트에 사용된 스프링클러가 반응 시간이 늦고, 오작동 등 문제를 일으키는 프리액션밸브(준비 작동식) 스프링클러였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스프링클러는 크게 습식, 건식, 준비 작동식과 일제살수식 등으로 분류하는데, 통상 지하주차장엔 건식과 준비 작동식 스프링클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준비 작동식은 습식에 비해 화재 감지 단계가 복잡하고 오작동 우려도 크다”며 “동파 방지 대책만 잘 준비된다면 지하주차장에선 습식 스프링클러로 변경하는 게 화재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하성 교수는 이어 “지하주차장 전기차 충전소에 칸마다 방화구획을 설치해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불이 다른 차량으로 옮기지 않게 막고, 배기시스템을 확충해 화재 발생 시 연기 배출을 용이하게 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부는 농수산물의 원산지 표시제도처럼 전기차의 배터리 제조사 표시제 도입에 나섰다. 국토교통부(국토부)는 전기차 제조사들이 배터리 제조사를 차량 제원 안내에 포함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기차 제조업체는 배터리 제조사나 제품명 등 상세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토부는 배터리 정보 공개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이 있다는 점을 감안, 신중하게 검토해 나갈 방침이다.
국토부는 이와 함께 2025년 2월부터 ‘배터리 인증’ 제도도 시행한다. 현재는 자동차 회사가 배터리를 단 차량을 만들어 판매하고 정부는 사후 점검을 하는 체계다. 그러나 2025년부턴 차량 등록 시부터 배터리마다 식별번호를 부여해 별도 등록한 뒤 안전 성능 시험도 사전에 거치게 하겠다는 것이다. 국토부는 “자동차 등록원부에 배터리 정보가 등록돼 운행부터 폐차까지 이력이 관리된다”고 했다.
민간에서도 이번 전기차 화재로 경각심이 커진 모양새다. 기간통신사업자인 KT는 5일 내부 공지를 통해 자사 업무용 전기차들의 지하주차를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는 화재 발생 시 유무선 통신 장애를 방지하기 위한 선제적 안전 관리 강화 조치로 해석된다. SK텔레콤 역시 비슷한 안전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전해졌다.
한국무역협회는 본사가 위치한 서울 강남구 무역센터·코엑스 지하 3층에 설치된 전기차 충전소를 옥상 주차장으로 모두 이전할 계획이다. 당초 계획한 2028년보다 이전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기로 했다. 지하 3층 충전소 총 50면 중 6면은 연내, 44면은 2026년까지 옮길 예정이다. 월평균 유동인구만 300만 명인 코엑스 쇼핑몰 내 전기차 화재 발생 가능성에 따른 직·간접 피해를 우려한 것이다. 코엑스 지하 3층 전기차 충전소는 삼성역 환승센터와 연결돼 있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