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0km 내외 차량 사고 시 상해 위험 거의 없어”…보험개발원 “분쟁 해소 및 보험료 부담 경감에 기여”
#‘살짝 부딪혔는데…’ 치료비 부풀리기 실태
2023년 1월 신호대기 중이었던 A 씨의 차는 뒤따르던 B 씨의 차량과 추돌했다. A 씨의 차량이 정차 중이었던 탓에 B 씨가 사고에 대한 모든 과실책임을 졌다. A 씨는 어깨와 허리통증 등을 호소했고, 8개월 동안 78회 통원 치료를 받았다. 차량 수리비가 34만 원에 불과한 경미한 사고였지만 A 씨는 치료비 553만 원에 더해 향후치료비(합의 후 치료에 들어갈 비용) 포함한 합의금으로 750만 원을 B 씨로부터 받아갔다. A 씨는 2주마다 한방 의료기관으로부터 꼬박꼬박 진단서를 발급 받아 치료 기간을 늘려갔다.
최근 5년 동안 경상환자 10명 가운데 4명 이상이 차종합보험으로 ‘책임보험의 한도금액’을 넘는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의무보험인 책임보험에서는 상해 정도에 따라 적정한 치료비 한도를 법적으로 정해 놓았는데, 종합보험에 가입한 경우 이를 넘겨서도 치료 받을 수 있다. 2023년 1월 약관 개정에 따라 4주 이상의 치료의 경우 2주 간격으로 진단서 제출 의무화가 시행됐지만, 전문가들은 환자를 유치해 수익을 내야하는 병·의원 입장에서 환자의 의사대로 진단서를 내줄 유인이 있다고 본다.
이를 악용해 스치듯 발생한 사고에도 수천만 원의 치료비를 청구하는 나이롱 환자가 많다는 게 보험업계의 주장이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차와 차가 부딪히지 않았는데도 열흘씩 입원하고 100일 이상 통원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면서 “비슷한 사고에 비슷한 부상인데, 사람에 따라 치료비와 합의금이 수백만 원씩 차이나는 구조는 분명 문제”라고 주장했다.
실제 최근 자동차 사고 경상환자의 진료비가 급증했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2023년 교통사고 상해 등급 12~14급의 경상환자 평균 진료비는 85만 3000원으로 10년 전의 30만 원보다 184.3% 증가했다. 이에 따라 과도한 보험금 지급으로 전체 운전자의 보험료가 오르는 부작용도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자동차보험 환자 지급보험금은 2023년 2조 5615억 원으로 2022년 2조 5142억 원 대비 1.88% 늘어났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 분쟁도 잦다. 보험연구원이 자동차보험 시장 점유율이 30%대인 C 손해보험사의 자동차보험 민원을 분석한 결과, 보험금 관련 가해자의 민원은 2016년 21건에서 2019년 113건으로 52% 증가했다. 이 같은 분쟁이 법적 다툼으로 이어지면 결국 사회적 비용이 된다.
소비자들 역시 경미한 사고에서 과도한 보험금이 지급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미한 교통사고를 경험한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경미사고 대인 보험금 관련 인식조사에서 1284명(85.6%)은 사고 시 탑승자 상해위험 판단에 의학적 소견뿐 아니라 공학적 근거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응답했다. 또 가해자 540명 가운데 256명(47.4%)은 피해자가 과도한 치료를 받았다고 답했다.
물론 경미한 충격에도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런 환자들은 MRI나 CT상 이상이 없지만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주로 한방병원을 찾아 치료를 진행한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치료 효과나 환자 만족도와 별개로, 그 통증이 이번 교통사고로 인한 것인지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면서 “피해자의 주관적 주장에 근거해 무제한 진료하고, 그 비용을 무한정 자동차보험금에서 지불하는 현재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경미한 사고 시 공학적 분석 활용돼야”
보험업계와 보험개발원은 치료비 및 보험금 산정 때 의료적 검사 외에도 공학적 시험 결과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자동차 사고 시 탑승자의 부상 여부는 주로 의료적 판단에 의존한다. 피해자가 상해를 주장하고, 의료진이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보험개발원은 “의료적 검사는 탑승자의 현재 건강 상태를 판단할 뿐, 사고와 부상의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8월 25일 보험개발원은 2020~2024년 국립과학수사원, 연세대 원주의대와 공동으로 진행한 ‘자동차 사고 시 부상 위험에 대한 연구’ 결과, 시속 10km 내외로 운전하던 자동차 사고에서 상해 위험이 거의 없었다고 발표했다. 시험에는 20~50대 성인 남녀 53명이 참여했으며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 뒷좌석에 탑승한 채로 진행했다. 보험금 지급 관련 분쟁이 많은 추돌, 접촉, 후진(주차 중) 충돌 사고를 재현했다.
시험 후 전문의 검진, MRI 촬영, 근전도 및 신경전도 검사를 진행했고, 참여자 53명 가운데 이상 소견이 발견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차량의 경우 범퍼 커버, 도어, 백도어 등 주로 외장부품이 손상됐다. 김관희 보험개발원 시험연구팀장은 “시험 후 뻐근하다고 언급한 참여자는 있었지만, 병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며 “충격량의 관점에서 다쳤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부딪힌 자동차의 속도 변화는 시속 0.2~9.4km로 나타났다. 추돌사고는 시속 5.5~6.7km, 접촉사고는 시속 0.2~3.4km였다. 충돌 전후 속도 차이가 클수록 상해 위험이 큰데, 이 같은 속도 변화는 놀이공원 범퍼카 탑승 시 발생하는 충돌과 비슷하다. 같은 시험에서 범퍼카가 충돌했을 때는 시속 5.8~6.6km의 속도 변화가 나타났다. 보험개발원은 “연간 약 5만 명이 범퍼카를 이용하지만 부상이 신고된 건은 한 건도 없다”면서 “자동차는 범퍼카보다 탑승자 보호 성능이 우수하기 때문에 속도 변화가 비슷하면 자동차 탑승자의 부상 위험이 더 적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보험개발원 허창언 원장은 “경미한 자동차 사고에서 보험금, 특히 진료비가 과도하게 증가해 보험료 인상의 원인이 되고 있다”면서 “공정한 보상을 통한 가해자와 피해자 간 분쟁 해소 및 운전자의 보험료 부담 경감을 위해 사고의 충격 정도 등 공학적 근거가 활용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나이롱 환자와 같은 보험료 과다 청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위험 요율을 산정하는 평가 기준을 다양화하는 일이 급선무”라면서 “공학적 분석 결과나 통계 수치를 반영하는 등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경미한 사고 관련 소송 과정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D 씨는 지하주차장에서 올라와 우회전을 하다 정차해있던 차량의 뒷부분과 부딪쳤다. 가벼운 사고처럼 보였지만, 병원 치료를 받은 피해 차량 운전자는 발목 인대가 파열됐다며 추가 치료비 등으로 1500만 원을 요구했다. 소송으로 이어졌는데, 법원에서는 보험금 청구를 기각했다. 피해 차량 속도 변화가 시속 2.4km 수준이었는데, 시속 8km 이하에선 상해 위험이 거의 없다는 연구 결과를 법원이 인정한 것이다.
해외에서도 공학적 분석결과를 부상 판단에 활용하고 있다. 독일과 스페인은 공학적 분석으로 해당 사고에서 부상을 당할 정도의 충격이 발생했는지를 고려해 보험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이미 시행 중이다. 독일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부딪힌 차량의 속도변화가 시속 11km 미만인 경우 부상위험이 없다고 판단해 대인 보상을 면책해 준다. 스페인의 경우 2016년 경미사고 대인보상 시 사고와 부상의 인과관계를 고려토록 법을 개정해 시행 중이다.
금융위원회와 국토교통부가 7월 첫 회의를 열고 자동차보험 치료비 누수를 막기 위한 제도개선에 착수하면서 공학적 근거 활용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서지용 교수는 “정부 차원의 제도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보험료 산정 시) 공학적 분석 결과를 활용할 경우 교통사고 진료비와 보험금 지급이 까다로워질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우려도 있지만, 결국 보험료는 예상치에 근거한 결과물이다. 건마다 조정하는 게 아니라 1년 단위로 보험을 갱신할 때 보험사가 약관 등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불편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