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연기 변신…“캐릭터 살리기 위해 43kg까지 살 뺐다”
작품을 본 해외 시청자들은 이렇게 작고, 마르고, 예쁘고, 정신 나간 여성 살인마의 사이코패스적인 면모에 먼저 놀란다. 그러면서 이 ‘보기 드문 미친 X’을 연기한 이가 ‘스위트 홈’의 이은유와 ‘오월의 청춘’ 김명희로 시청자들의 눈물을 뺐던 배우 고민시(29)라는 것에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매력적인 사이코 유성아를 두고 이제까지 연기한 캐릭터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인물이었다고 자평한 고민시는 “제가 가진 찰나의 표정에서 시작된 인물”이라며 오디션 당시를 떠올렸다.
“사실 대본을 봤을 땐 애초부터 제가 선택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활자로만 읽어봐도 단순히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저와는 정말 거리가 있는 캐릭터니까요. ‘이 작품은 (선택이) 돼도 (내가) 문제다’ 이런 생각까지 들더라니까요(웃음). 그러다 2차 미팅에 참석하게 됐는데 그날따라 제가 예전에 사서 한 번도 안 신은 구두가 신고 싶은 거예요. 그걸 보시고 감독님이 ‘구두 예쁘네?’ 하셔서 제가 ‘특별한 날만 신는 거예요’라고 말했는데 감독님이 그 대답을 하기 전 제 표정에서 유성아를 봤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렇게 느껴주셨으니, 저 역시 감독님을 믿고 이 한 몸 내던져야겠다고 생각했죠(웃음).”
고민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서 어느 여름날 영하(김윤석 분)의 펜션을 찾아 살인사건을 일으킨 뒤, 이를 덮어주면서 공범 아닌 공범이 된 영하와 펜션에 이상하리만큼 집착하는 살인마 유성아를 연기했다. 우연이든 고의든 자신의 앞길을 막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모두 죽여 버리는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갖춘 유성아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가운데 유독 그 행적이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다.
과거사가 편린처럼 드러나긴 하지만 그의 전체 서사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회를 거듭할 때마다 보여주는 충동적인 행동도 작품의 분위기와 다소 어긋나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불협화음으로 받아 들여질 수도 있는 유성아의 이런 위험한 지점에 대해 작품을 연출한 모완일 감독은 “작두를 타는 것”이라고 고민시에게 귀띔했다고 했다.
“성아는 1부 등장을 시작으로 후반부로 갈수록 변화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크게 폭발하게 되죠. 그 기점에 대해 감독님이 ‘작두를 타야한다’고 말씀해주셨던 기억이 나요(웃음). 사실 저는 이 캐릭터의 서사, 전사,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감독님께 들어서 다 알고 있었지만 극에선 보여주지 않아요. 그걸 보여준다면 시청자들이 살인마를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돼선 안 된다는 게 감독님의 지론이셨거든요. 살인마는 어떻게든 납득이나 설득이 돼선 안되고, 우리 드라마의 중점은 ‘돌에 맞은 개구리’, 즉 살인사건 후 남겨진 피해자들이니까요. 그래서 성아의 행동엔 이유가 있더라도 그걸 설명하지 않았어요.”
모 감독이 말한 성아의 이 ‘작두 타기’는 후반부 영하와 생사를 건 팽팽한 갈등을 빚으면서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을 손에 넣었다고 전화 통화로 의기양양하게 말하면서도 제 분을 못 이겨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신으로 지목된다. 악에 받친 비명처럼 “아저씨!”를 연달아 외치는 이 신 속의 성아의 모습을 두고 그를 오래전부터 봐온 팬들마저도 ‘고민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는 호평이 이어지기도 했다. 본인의 연기에 보통은 엄격한 편이었지만 이 신을 얘기할 때만큼은 고민시 역시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원래는 ‘아저씨, 펜션엔 언제 올 거예요?’라는 한 줄 대사였는데 이 안에 유성아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임팩트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마침 또 그날 낮부터 체력 소모가 많았던 액션 신을 끝내고 저녁의 마지막 촬영이 그 장면이었는데요(웃음). 어떻게 하면 이 한 문장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지 촬영 당일까지 계속 압박감을 느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결국 ‘현장을 믿고 맡기자’는 결론을 내려서 실제 촬영 날엔 대사가 딱 그렇게 나왔던 거죠. 다들 놀라면서도 그 장면을 많이 만족해주셔서 좋았어요(웃음).”
유성아는 보기 드문 미친 여자이자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는 본성을 가졌지만, 이를 둘러싸고 있는 외면만큼은 신비로울 정도로 예뻐야 한다는 모순적인 설정이 있다. 고민시가 가진 매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문에 맞춰 배우와 제작진이 머리를 맞대 만들어 낸 모습이 지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통해 볼 수 있는 유성아였다고. 이 아름다운 살인마를 완성하는 데 고민시는 이전보다 바짝 ‘말려야’ 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외적인 부분을 준비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감독님께서 ‘성아는 연기도 중요하지만 외적인 부분이 예쁘게 나와야 해’라고 하셔서 부담도 됐고요(웃음). 보시면 유성아는 피부가 돋보이는 의상을 주로 입고 나오는데, 뼈나 몸의 근육이 좀 더 동물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고른 옷들이에요. 액션 신에서 제가 상대의 목을 조를 때도 제 척추 뼈가 그대로 드러나는 게 보이거든요. 그 신에서 유성아라는 캐릭터로서 날것의 느낌이 나길 바라서 제가 살을 정말 많이 뺐었어요, 43kg 정도로. 사실 이젠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살이 잘 안 빠지고 힘든데 이번 작품에선 힘들단 생각이 잘 안 든 게 신기하더라고요. 이 장면만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게 기대가 먼저 돼서 그랬나 봐요(웃음).”
작품 자체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다소 ‘불친절한 드라마’라며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그 일원으로서 제 모든 것을 내던진 고민시를 향한 찬사만큼은 ‘진짜배기’였다. ‘본 적 없었던’ 얼굴을 위해 쏟아낸 ‘한 적 없었던 노력’을 빛을 발한 셈이다. 그런 만큼 고민시에게 있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평가와 흥행을 떠나 깊은 흔적과 이를 채워낸 울림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이번 작품은 제 20대의 마지막이자 30대의 시작에서 찍은 작품이라 제 자신에겐 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요. 어떻게 보면 제 연기 인생의 지표가 될 작품이라고도 생각해서 더욱 애착이 가기도 하고요. 앞으로 이 작품을 넘어 30대의 고민시는 좀 더 넓은 곳에서 연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싶어요. 작품적으로도 꾸준하게 인사를 드리겠지만 제 나름대로 공부도 하려고 하거든요. 아마 외국어 쪽이 될 것 같은데(웃음), 그렇게 따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시기가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이죠. 그만큼 저도 저의 30대가 너무 궁금하고, 또 기대돼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