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연=박연진’ 공식 깬 새로운 터닝 포인트…“처음으로 본능적인 연기 펼쳐”
“살짝 수줍게, 귀엽게 ‘알’을 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웃음). 저는 이제까지 연기를 하면서 어떤 캐릭터라는 알을 ‘엄청 단단하고 명확하게 만들어야 해, 그래야만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을 늘 해 왔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만큼은 ‘이번엔 이 알이 깨지면 좋을 것 같아’란 생각을 처음으로 해 봤어요. 제게 있어서는 진짜 큰 용기이자 도전이었던 거죠. 그 알을 깼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된 것 같아요.”
임지연의 알을 깨어낸 영화 ‘리볼버’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갔던 전직 경찰 수영(전도연 분)이 출소 후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직진하는 이야기를 그린 ‘범죄+누아르+스릴러’ 영화다. 극중 임지연은 모두에게 잊혀 절망의 구렁텅이를 목전에 둔 수영에게 홀연히 나타난 ‘정마담’ 윤선 역을 맡아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경계를 특유의 텐션으로 넘나든다.
윤선은 남자들만의 세계로 치우치기 쉬운 누아르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임과 동시에 수영과의 묘한 ‘워맨스’를 그리며 서사와 스크린을 모두 장악해 가는 독특한 캐릭터다. 그에 대해 임지연은 이 영화의 감독과 각본을 맡은 오승욱 감독의 전작 ‘무뢰한’(2015) 속 전도연이 맡았던 캐릭터 김혜경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무뢰한’보다 좀 더 톡톡 튀는 김혜경의 모습이 윤선이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윤선이는 정말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여자거든요. 남자도 많이 만나보고, 돈도 뜯고, 이용도 하고 배신도 하는 그런 것들이 익숙한 여자죠. 그렇게 수영도 뜯어먹을 게 있을 것 같아서 만났는데 이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쿨하고 멋있어서 반한 거예요(웃음). 나와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수영을 보면서 윤선은 습관처럼 배신하려다가도 저도 모르게 응원하고, 도와주려는 모습을 보여요.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묘하게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기했죠.”
“난 딱 요만큼만 언니 편이에요”라는 극중 대사처럼 윤선은 최초 목적대로 수영을 이용해 먹으려 하지만 어느새 그에게 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둡고 눅눅한 ‘리볼버’의 분위기 속 유난히 튀는 ‘하이 톤’을 가져가는 윤선이기에 이런 감정의 변화가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한편으로 임지연은 이처럼 감정 폭이 ‘널을 뛰는’ 윤선의 캐릭터성을 잡아가기까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선배님들 사이에서 제가 얼마나 잘하고 싶었겠어요. 그렇게 욕심은 많았는데 잔뜩 쫄아서 ‘저 어떻게 해야 해요’하고 하소연했는데 김종수 선배님이 제게 ‘네가 술만 마시면 그냥 윤선이야’ 그러시는 거예요(웃음). 제가 술자리에서 선배님들과 잘 어울리고, 먼저 다가가고 하이 톤으로 애교부리고 그러거든요. 선배님이 ‘윤선이의 모습이 너 술 마실 때랑 똑같으니까 해봐. 못할 것 같지? 일단 그냥 해봐’라고 하시는데 그때 딱 깨닫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그냥 해보지 뭐!’ 이런 느낌이 오더라고요.”
시종일관 “쫄았다”는 말을 하지만 스크린에서 임지연이 보여준 윤선은 전도연의 수영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누아르라는 장르에서 색채가 다른 두 여성 캐릭터가 보여준 이 농도 짙은 케미스트리는 ‘리볼버’를 향한 호평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만큼 현장에서 이 둘의 실제 케미스트리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예종 재학 당시 ‘한예종 전도연’을 자칭하고 다녔던 임지연과 그의 영원한 우상이자 ‘여왕’이었던 전도연의 현실 호흡은 어땠을까.
“워낙 대단하신 선배님이니까 저 혼자 쫄아서 ‘나 연기도 못하고 혼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렇게 현장에 갔는데 전도연 선배님이 촬영 들어가기 전 제 눈을 빤히 바라보시는 거예요. 그 모습이 그냥 하수영이었어요. ‘정윤선, 너 왜 왔냐’라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시는데 그 기운이 그대로 느껴지더라고요. 선배로서 후배에게 ‘너 잘해라’하는 게 아니라 ‘너 정윤선이지? 나 하수영이야’라며 인물로서 전달하는 기운을 받은 거죠. 저도 언젠가 후배에게 그런 기운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제가 안 그래도 시사회 뒤풀이에서 선배님께 이 이야기를 했는데요, 전혀 기억을 못 하시더라고요. ‘내가 언제 그랬어!’라고(웃음).”
‘그’ 전도연에게서 받은 기운을 그대로 쏟아낸 임지연은 이번 ‘리볼버’에서 자신의 연기에 이전과는 또 다른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2011년 데뷔 후 13년 간 연기의 길을 걸어온 동안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연기해 봤고,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를 깨달은 첫 순간이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저는 아직도 재능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무서워요. 선배님들처럼 현장에서 느껴지는 대로 애드리브를 할 수 있는 감각적인 배우가 아니라고 스스로 여기거든요. 그래서 혼자서 애쓰고 생각도 많이 하면서 캐릭터를 분석해 왔는데 문득 이번엔 처음으로 용기내서 ‘나도 한 번 감각적으로 움직여보자’란 결심을 하게 됐어요. 많이 생각하지 않고 감각에 맡겨서, 본능적으로 움직인 건 정말 이번 현장이 처음이었죠. 제게도 첫 경험이다 보니 스스로도 재미있다고 느끼면서도 솔직하게 저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더라고요(웃음). 제 자격지심을 깨고 ‘그냥 날 한 번 믿어보자’라는 생각으로 캐릭터를 입었던 거니까요.”
자신을 둘러싼 알의 껍데기를 깨고 다음 세상으로 한걸음을 내딛은 임지연은 그간 종종 전작의 그림자에 부딪쳐야 할 때가 있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속 그가 맡았던 박연진이 여전히 대중들의 머릿속에 드리워져 있다는 것은 변신을 거듭해 나가야 할 그에게 있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리볼버’ 속 윤선도 언뜻 보기에 “박연진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만큼 임지연에게서 박연진은 떼어놓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가 돼 버린 건 아닐까. 이런 우려에 대해 임지연은 “어떤 캐릭터든 박연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갈 자신이 있다”며 웃어보였다.
“연진이도 윤선이처럼 겉치장을 하고 화려한 사람이라 그런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자신 있었어요. 둘은 전혀 다른 인물이니까요. 관객 분들이 영화를 직접 보신다면 그 둘을 다르게 느끼실 거예요. 아무래도 ‘더 글로리’가 워낙 잘된 작품이고, 저도 연진이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보니 다음 작품에서도 연진이처럼 보일 것이라는 말씀들을 하세요. 하지만 전 (다르게 보일) 자신이 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도 굳이 ‘나는 연진이를 깰 거야, 사람들이 나를 연진이로 안 봤으면 좋겠어’ 이런 식으론 하진 않을 거예요. 그럴 생각도 없고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