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앞두고 ‘요처’로 안테나 세우기
▲ 한화그룹이 최기문 전 경찰청장(사진)을 고문으로 선임해 눈길을 끌고 있다. 대선정국을 맞아 고위인사를 영입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 ||
집권 말기를 맞이하는 기업들은 초조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치적을 남기려는 현 정부세력과 정권 창출을 도모하는 신진세력 사이에서 정보 수집 능력이 허술할 경우 낭패를 겪을 수 있다. 정경유착의 고리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재계는 정치권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다. 민주화 이후 몇몇 기업은 판단착오로 잘못 베팅(?)했다가 대선 뒤 후폭풍을 겪었던 경험이 있기 대문이다.
그래서인지 각 기업은 대선정국에서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자체 정보수집체계를 확대해 정치권 분위기와 경제관련 주무부서의 정책 동향 파악에 나서고 있다. 대선정국을 맞이한 재계에서 가장 뜨거운 러브콜을 보내는 집단은 수사·정보 담당 요직 출신 그리고 경제정책 주무부처인 재경부와 금감원 출신 인사들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기업의 고위인사 영입사례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한화그룹의 최기문 전 경찰청장 영입이다. 한화는 지난 1월 3일 최 전 청장을 그룹 고문으로 선임하면서 대기업의 전직 경찰총수 영입 첫 사례를 남겼다. 현 정부에서 2년여간 경찰청장을 지낸 최 전 청장은 경찰 정보업무 요직을 두루 거친 정보통이다.
한화의 최 전 청장 영입을 두고 정·재계 인사들은 대선정국에서 최 전 청장의 능력을 활용하려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최 전 청장은 정치권의 영입설에 자주 휩싸였던 인물이다. 정치권 동향은 물론 전직 경찰총수로서의 정보력 또한 대선정국을 맞이한 한화에 큰 전력상승 요인이 될 것이란 평이다.
여의도 국회 주변 인사들은 “한화가 다른 대기업에 비해 대외정보 분야가 큰 편이 아니었는데 최기문 전 청장 영입 전후로 수사당국과 정보당국 출신 인사들 영입에 공을 들인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2002년 대한생명 지분 매입 당시 맥쿼리생명과 맺은 이면계약 때문에 예금보험공사와 신경전을 벌이는 점 또한 한화가 대선정국 하에서 정보망을 넓혀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자칫 대선열기 속에 한화의 대한생명 지배권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한화의 고위인사 영입이 최근 화제가 됐지만 현 정부 요직 출신 인사들 영입에 가장 큰 공을 들여온 곳은 삼성그룹이다. 현 정권 들어 삼성은 지배구조와 상속관련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금산법 개정안 국회통과로 인해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 식의 순환출자구조의 틀이 흔들리게 됐으며 이건희-이재용 총수부자 지분 승계과정에서 발생한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증여 의혹 사건이 재판 중이다. 이에 삼성은 ‘지피지기 백전백승’의 논리를 실천하듯 현 정부 경제분야에서 요직을 거친 인사들을 영입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대표적 인물로 지난 2004년 말 영입된 김병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사장급)을 꼽을 수 있다. 전남 신안 출신인 김 위원은 지난 1976년 행정고시 합격 이후 재경부 전신인 재무부에 발을 들여놓아 지난 2004년까지 재경부에서 지낸 전형적인 재무통. 특히 참여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정책비서관, 금융정보분석원장, 재경부 기획관리실장 등 경제분야 요직을 섭렵해 현 정권의 경제정책을 꿰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DJ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실 행정관을 거쳐 현 정부 들어 재경부 총괄기획과장을 역임한 방영민 삼성증권 상무도 지난 2003년 말 삼성맨이 됐다. 금감원 국장을 거친 김광진 삼성화재 감사도 지난 2004년 5월부터 삼성에 몸을 담고 있다. 연해철 삼성증권 전무는 현 정권에서 금감원 조사2국장을 거쳤고 곽상용 삼성생명 전무는 현 정부 초기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재경부 국제기구과장을 역임했다.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도 현 정부 관료 출신 인사를 영입했다. 현대그룹 계열인 현대증권은 지난해 금감원 조사1국장을 역임한 변원호 감사위원을 영입했다. 조사1국은 불공정거래 행위 조사를 전담하는 곳. 증권시장의 불공정거래 사례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만큼 이 분야 전문가인 변 위원 영입을 통해 방패막이 겸 사전에 내부검열을 통해 문제가 될 만한 소지를 없애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대선정국에서 대북문제가 주요 변수로 떠오르는 만큼 대북사업 주체인 현대 역시 관료 출신 인사를 영입해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안테나를 세웠다는 평이 나돈다.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로 최태원 회장의 옥고를 경험한 SK그룹도 관료 출신 영입에 공을 들이는 듯하다. SK텔레콤은 지난해 옥화영 전 공정위 과장을 SK경영경제연구소 고문으로 선임했다. 통신시장 독과점 등과 관련해 정부의 규제를 받아온 SK텔레콤이 국내 최고의 경쟁법 전문가로 알려진 옥 고문을 영입해 눈길을 끌었다. 최근엔 수사·정보 담당 출신 인사들에 대한 영입설도 끊이지 않고 있다.
관료 영입 바람은 외국계 회사에도 불고 있다. HSBC은행은 지난해 말 금융감독원 인력개발실 교수를 지낸 정상덕 씨를 신임 감사로 선임했다. 정 감사는 국무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 전문위원을 거쳐 현 정부에서 금감원 뉴욕사무소장, 금감원 부산지원장 등을 역임했다. HSBC는 이에 앞서 재경부 제2차관보와 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를 지낸 신명호 씨를 지난 2005년 11월 HSBC 한국법인 회장으로 선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업계에선 외국계 은행 지점에 대한 실질적 인허가 규제권을 지닌 금감원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대선정국에서 외국계 자본에 대한 논란이 일 경우에 대비한 것이란 평도 제기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