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탈 막는 ‘애프터서비스’ 공식화
그러나 일부 대기업에서 인사철에 옷을 벗는 임원들은 당장 생계에 지장을 받는 일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해당 기업들이 퇴직 임원에 대한 예우 시스템을 잘 갖춰놓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요즘 대기업은 뒤탈을 우려해서인지 퇴직 임원 관리를 조직적으로 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임원들에게 가장 좋은 대접을 해주는 곳은 재계 1위 삼성그룹이다. 삼성에서 부사장급 이상의 자리에 있다가 물러나게 되면 다른 기업의 스카우트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다른 일을 구하지 못한 경우 삼성에서 2~3년간 예우를 해주게 된다. 회사 생활할 때 받던 봉급의 70~80% 이상을 수령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며 현직 때 지급받은 자동차와 운전기사도 ‘예우 기간’ 동안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삼성은 상무급 이상 임원인 상태에서 퇴직한 인사들에게도 일정 기간 동안 적정 수준의 급여와 비서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그룹의 퇴직 임원 관리는 단순한 예우 차원을 넘어 ‘사후 사고 방지 관리’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른 업체의 수요가 없어 무직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삼성그룹 내 요직에 있다가 현직에서 물러날 경우 그룹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곳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전언이다. 주요 보직에 있던 퇴직 임원들은 삼성그룹 내 주요 사안을 꿰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수사당국이나 다른 업체들의 타깃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삼성이 외환위기 이후 퇴출시킨 자동차사업 분야에 관련됐던 주요 핵심임원 중 일부는 회사 퇴직 뒤에도 삼성에서 사무실과 주택 등을 일정기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삼성의 세심한 관리는 리스크 예방 차원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제주도지사직에 출마했던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의 경우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 수사과정에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의 ‘입’에 삼성가 오너와 현직 임원의 운명이 걸린 셈이다.
삼성의 퇴직 임원에 대한 사후 관리 시스템은 지난해 현대차 비자금 사태 당시 더욱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정몽구 회장의 수시인사에 불만을 품은 일부 전·현직 임원의 제보가 현대차 비자금 수사의 발단이 됐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퇴직 임원에 대한 재계 1위 삼성그룹과 2위 현대차그룹의 예우 수준 차이가 곧잘 비교됐던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퇴직 임원 대우가 상대적으로 박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전무급 이상이 퇴직할 때만 ‘필요에 따라’ 1년간 고문으로 위촉하고 급여의 80%를 준다. 가끔 협력업체로 전직을 주선하기도 하지만 조건이 맞지 않을 때가 많다.
또 LG는 ‘아웃플레이스먼트(Out Placement)’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LG전자가 2002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6개월 과정으로 정리-탐색-새출발이라는 3단계를 거친다. 초기엔 노여움과 충격을 풀어 주는 심리 조절을 하고 마지막 단계에선 취업전략 수립과 창업 아이템 분석을 배운다.
SK그룹의 경우 퇴직 당시 직급과 그룹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퇴직 임원에 대한 예우기간이 정해진다고 한다. 업계 인사들 사이엔 상무급은 1년, 전무급은 2년, 부사장급 이상은 2~3년 정도의 예우 기간이 주어진다고 전해진다.
급여 수준은 삼성그룹보다 약간 낮은 편이지만 현직에 있을 당시 받던 봉급을 그대로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해진다. 사장급 이상 임원은 퇴직 후 최고경영자 모임에 가입하고 그룹 측에서 제공한 사무실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최태원 회장이 SK(주) 출신 퇴직 임원 모임인 ‘유경회’ 멤버를 상대로 매년 초청행사를 여는 등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삼성(성대회, 성우회) LG(LG클럽) CJ(CJ클럽) 등 대부분의 대기업이 퇴직 임원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공간을 따로 제공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사장직이나 부사장직에서 퇴임하는 경우 상담역이나 자문역 등으로 2년 정도의 예우기간을 제공한다. 상담역과 자문역은 대부분 비상근이지만 상근일 경우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들에겐 예우기간 동안 섭섭지 않은 급여와 사무실 비서 차량 등이 지원된다고 한다.
대한항공이나 금호아시아나 같은 항공사들도 일부 퇴직 임원들에게 일정기간 동안 적지 않은 급여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항공사들은 특히 일부 퇴직임원에게 할인항공권 사용 권한을 주는데 기여도와 직급 등에 따라 평생 항공권 할인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새로운 비즈니스를 낳기도 한다. 일부기업에선 임원을 포함해 일정직급 이상의 직원을 퇴사시킬 경우 일정 기간 이들의 ‘관리’를 전문회사에 위탁하기도 한다.
‘퇴직’이라는 쇼크 앞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고’도 막고 전직을 도와주는 의미에서 새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 사무실도 마련해주는 등 퇴직 후 애프터서비스를 공식화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