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률 4543%, 외국계 중심 ‘부담’ 목소리…식약처 “인상율 완화나 유예조치 등 따로 검토 안해”
#전문 역량 갖춘 신약 심사 인원 늘린다
식약처는 지난 9월 9일 수익자부담 원칙을 전면 적용하는 내용의 ‘의약품 등의 허가 등에 관한 수수료 규정’ 개정안을 행정예고했다. 수익자부담 원칙이란 특정 정책 시행으로 이익을 얻는 수익자가 해당 정책의 소요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재원 마련의 기본원칙을 뜻한다. 식약처는 전문 역량을 갖춘 심사 인원을 늘려 신약 허가·심사 기간을 단축하는 대신 제약사가 부담하는 수수료를 기존 883만 원에서 4억 1000만 원으로 4543%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관련업계는 심사기간 단축 소식과 관련해서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기존 신약 심사는 최대 400일 이상이 소요됐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6~8개월 정도 걸리는 해외와 달리 국내는 1년이 넘게 기다려야 하는데 그동안 ‘신약’은 ‘헌약’이 될 수밖에 없다. 제네릭(복제약)도 그렇지만 신약은 특히 타이밍이 중요한데 국내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까 심사가 적시에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라며 “심사 시간이 단축될 수 있다면 비용 부담을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 산업계 입장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조치가 이뤄진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해외의 신약 허가 수수료는 △미국 식품의약청(FDA) 53억 원 △일본 의약품·의료기기 종합기구(PMDA) 4억 3000만 원 △유럽 의약품청(EMA) 4억 9000만 원 △캐나다 히스 캐나다(HC) 5억 5000만 원 수준이다.
식약처는 심사기간 단축을 위해 전문 의·약사 등 고역량 심사자 비율을 현행 31%에서 70% 이상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제품별 전담 심사팀도 신설한다. 인상된 수수료는 심사 인력을 늘리기 위한 인건비로 사용될 방침이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은 “심사 수수료를 현실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신에 그 기대에 부응할 만한 인프라를 얼마나 체계적이고 빈틈없이 구축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유예 조치 필요” 목소리 나오는 이유
식약처에서 내놓은 수수료 인상안과 관련한 우려와 반발의 목소리도 나온다. 수수료 인상률이 지나치게 가파르다는 지적이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는 지난 9월 26일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유사한 수수료를 책정하고 있는 일본 대비 한국의 시장규모는 4분의 1, 약가는 60% 수준에 불과하다”라며 “약 50배에 달하는 큰 폭의 허가 수수료 상승, 유예 기간이나 순차적 적용 없이 개정안이 갑작스럽게 발표된 점에 업계가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KRPIA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국내 제약사들보다는 글로벌 빅파마(다국적 제약사)들이 수수료 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식약처 누리집에 따르면 2022년까지 국내에 허가된 신약은 1717개다. 이 중 국산 개발 신약은 2022년 기준 총 37개뿐이다.
특히 ‘퍼스트 인 클래스’로 통칭되는 혁신 신약은 전부 수입산이다. 약은 특정 질환을 타깃으로 한 최초의 약물인 퍼스트 인 클래스와 계열 내 최고의 약물인 ‘베스트 인 클래스’로 나뉘는데 국산 신약 중에서 베스트 인 클래스는 있지만 퍼스트 인 클래스는 전무한 상황이다. 제약업계 다른 관계자는 “국내 제약사 중에 혁신 신약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국내에서 유통하려는 기업들도 신약 허가를 받아야 한다. 수수료가 대폭 상향 조정됐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선 분명히 부담스럽긴 할 것”라고 말했다.
수수료의 갑작스런 상향이 국내 신약 접근성을 더욱 낮출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의 KRPIA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지켜봐야 할 거 같다”면서도 “한국 시장에서 신약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신약의 진입이 늦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허가 수수료가 높아지면 제약사들이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비용이 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수수료를 대폭 올리게 되면 신약의 접근성 측면에서도 우려가 생길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지나치게 일정이 급박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수수료 인상은 당장 내년 1월부터지만 심사인력은 확충되지 않은 상태다. 식약처 측에서는 연말부터 인력 확충에 나설 방침인 것으로 보인다. 제약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고급 인력 바로 늘리기가 쉽지 않다. 인력을 어떻게 확보하고 여건을 만드느냐가 만만치 않은 과제인데 인프라를 먼저 확실히 갖춘 후 수수료를 올리는 것이 맞다”라고 지적했다.
실효성 관련 지적도 나온다. 국내 한 제약사 관계자는 “이미 혁신 신약의 경우 미국은 패스트트랙, 국내는 조건부 허가로 허가를 빠르게 내주는 제도가 있다. 신약발전기금을 조성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2~3배도 아니고 50배를 올리겠다는 건 차이가 너무 크고 업계 종사자로서 인지세를 올려받겠다는 뜻 정도로 느껴진다”며 “신약을 출시하는 입장에서는 식약처뿐만 아니라 국민건강보험공단,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심사평가원까지 네 곳의 정부기관과 소통하면서 복잡한 행정 서류 작업을 처리하는 것이 장벽이다. 이런 부분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면 모를까 당장 와 닿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식약처 관계자는 “신약 심사 인력을 얼마나 어떻게 늘릴지 등 구체적인 계획은 향후 수립할 예정이다. 외부 단체 의견은 인지하고 있으나 이미 행정예고하기 전에 여러 번에 걸쳐서 조율을 거친 바 있고 수수료 현실화와 관한 논의는 예전부터 계속 나왔기 때문에 유예조치나 인상률 완화 등은 따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라고 밝혔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