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함박눈으로 ‘과거 얼룩’ 덮기
▲ 지난 2월 17일 노무현 대통령이 평창에 대한 현지 실사를 위해 방한한 IOC 조사평가위원들과의 면담에 앞서 박용성 IOC 위원과 악수하고 있다. IOC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도 보인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박 전 회장이 얼마 전 경영 복귀 의사를 밝힌 것 또한 호사가들의 입을 바쁘게 만들고 있다. 박 전 회장은 오는 3월 두산중공업 주주총회에서 사내 이사로 등재돼 경영 일선에 나설 발판을 마련하고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일인 7월 4일 이후엔 본직인 기업인으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올림픽 유치 활동이 끝나는 대로 두산중공업 대표이사직에 오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2005년 11월 두산그룹 ‘형제의 난’ 파문으로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1년 8개월 만에 화려한 비상을 도모하는 셈이다. 사면을 받자마자 경영복귀 시점을 못 박고 대외행보를 벌이는 박 전 회장의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번 특별 사면 명단에 경제인들이 대거 포함됐음에도 지난 2003년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태로 구속수감 등의 굴곡을 겪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제외됐다. 최 회장 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항소 중일 경우 사면대상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에 빠진 것이다.
반면 박용성 전 회장은 항소심에서 1심 판결과 동일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벌금 40억 원의 선고를 받고도 3심을 포기했다. 이에 대해 ‘박 전 회장은 사면 대상자에 포함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라 고 수군거리는 호사가들도 있다.
박 전 회장이 사면 리스트에 포함된 것을 두고 IOC의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 실사단이 2월 13일 방한해 2월 14일부터 16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평창 일대를 방문했던 것과 연관 짓는 시각도 있다. 박 전 회장은 IOC 위원 신분이지만 ‘형제의 난’ 이후 기소된 뒤 위원 직무정지처분을 받은 상태다. 국내에서 이뤄지는 사면 복권이 박 전 회장의 IOC 위원직을 당장 회복시킬 권한은 없지만 박 전 회장이 유치활동을 벌이는 데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줄 순 있는 셈이었다.
박 전 회장을 포함한 이번 특별 사면은 IOC 실사단 파견일보다 하루 앞선 2월 12일에 이뤄졌다. 2월 19일 설날보다 일주일 앞선 점과 당초 설날과 3·1절 중 언제 특사가 이뤄질 것일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박 전 회장의 사면일은 꽤나 절묘했던 셈이다.
박 전 회장 사면 배경을 두고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정부의 의지가 표출된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선 정권 말기에 접어든 현 정부가 수면 아래에선 남북정상회담, 수면 위에선 2012년 여수 세계 박람회와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세계 박람회와 동계올림픽은 재계의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정-경 교감이 이뤄졌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는 올 7월 4일에 최종 선정된다. 두산 총수일가 ‘형제의 난’ 이후 두산 측은 외부 인사 영입을 통한 경영 투명성 강화를 천명해왔다. 두산 경영을 맡을 새 CEO로 진념 전 부총리 같은 인사들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두산 경영권은 총수일가의 품을 떠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면 통지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박용성 전 회장이 직접 경영복귀 운운하는 것은 비난여론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박 전 회장이 7월 4일 이후를 경영복귀 시점으로 못 박은 것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통해 정부의 지지를 얻는 동시에 평창과 강원도 일대의 지지 여론을 등에 업고 그동안의 도덕성 논란을 잠재우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형제의 난’ 이후 두산 측은 지배구조 개선 차원에서 (주)두산을 지주회사로 전환할 계획을 밝혔다. ‘지주회사를 장악해야 그룹 전체를 장악한다’는 통념 때문인지 일각에선 박 전 회장이 (주)두산이 아닌 두산중공업으로 가려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런데 그룹 내 사정을 들여다본다면 (주)두산이 아닌 두산중공업에 복귀하려는 박 전 회장의 속내를 읽어볼 수도 있을 법하다. (주)두산은 현재 두산중공업의 지분 41.39%를 보유하고 있으나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산업개발 두산엔진 등 핵심계열사 지분은 갖고 있지 않다. 반면 (주)두산의 지배를 받고 있는 두산중공업은 두산인프라코어(38.91%) 두산산업개발(30.06%) 두산엔진(51%) 두산메카텍(100%) 등의 지분을 골고루 보유하고 있다. 두산재팬 두산말레이지아 등 몇 개의 해외법인의 경우 두산중공업이 지분 100%를 통째로 보유하고 있다. (주)두산을 장악하면 이는 두산중공업 장악으로 이어지지만 두산중공업을 접수하면 이는 그룹 핵심계열사들에 대한 통제력 강화로 이어지는 셈이다.
지주회사 전환을 앞두고 있는 (주)두산의 지분구조는 두산 총수일가와 우호지분으로 39.62%가 채워져 있다. 두산가(家)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은 현역에서 물러난 상태고 차남인 박용오 전 회장은 이미 그룹 내에서 힘을 잃은 상태라 총수일가의 주도권은 사실상 박용성 전 회장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두산은 여전히 박 전 회장 영향력 하에 놓여있는 셈이다. 결국 박 전 회장의 두산중공업 복귀는 그룹을 장악하는 수순 밟기일 가능성이 높다.
박 전 회장의 경영복귀 시점과 맞물려 두산그룹 안팎엔 거대한 M&A 참여 바람이 일어날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두산그룹은 올 하반기에 본격화될 현대건설과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적극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을 통한 정부와의 교감 강화가 박 전 회장의 M&A 구상과 맞물려 있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지난 2005년 7월에 일어난 ‘형제의 난’은 그룹 경영권에 대한 갈등으로 빚어진 사건이었다. ‘두산 측의 박용오 당시 그룹 회장에 대한 명예회장 추대, 박용성 당시 두산중공업 회장의 그룹 회장직 승계’ 결정 이후 박용오 전 회장이 박용성-박용만 형제의 1700억 원 비자금 조성 의혹을 폭로하면서 결국 두산 총수 형제들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박용성 전 회장 계획대로라면 지난 2005년 11월 그룹 회장직에서 사임한 지 1년 8개월 만인 오는 7월 경영일선에 복귀하게 된다. 두산그룹 회장직에 잠시 앉았다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재계의 미스터 쓴소리’ 박용성 전 회장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통해 쓴 웃음이 아닌 환한 미소를 짓게 될지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