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곳은 많고 ‘대박(대생상장)’은 산 넘어 산
▲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 ||
한화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격인 (주)한화는 지난해 12월 말 한국바스프가 갖고 있던 한화석유화학(한화석화)의 지분 14.52%를 1200여 억 원에 사들여 한화석화의 지분을 38.7%로 끌어올렸다. 지주회사가 상장 자회사 지분을 30% 이상 보유해야 하는 현행규정을 충족시킨 것.
한화그룹은 이에 그치지 않고 금융계열사에 대한 지배구조 개편에도 착수했다. 지난 2월 20일 한화증권은 공시를 내고 100% 자회사인 한화투신운용(한화투신)을 대한생명(대생)에 넘기기로 했다는 양해각서를 작성했다고 공시했다. 대생의 한화투신 인수가액은 주당 7000원 선으로 총 420억 원 규모. 비금융 계열사는 (주)한화를 중심으로, 금융 계열사는 대한생명을 중심으로 새판짜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것이다.
그동안 한화는 지주회사 체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배구조 재편에 따른 비용 문제로 가시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왔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한화가 2세 승계까지 염두에 둔 지배구조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는 신호가 사방에서 나오고 있다.
문제는 돈이다. 한화는 대한생명을 인수한 뒤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를 위해 우호지분인 오릭스-OFIS가 갖고 있는 대생 지분 17%(1억 2070만 주)에 대한 주식매수청구권(되살 수 있는 권한)을 지난해 9월 초 행사했다고 공시했다. 이 오릭스 지분 인수 후보자는 한화, 한화석화, 한화종합화학 등 한화 계열 6개사다. 또 한화는 예금보험공사(예보)가 갖고 있는 지분 49% 중 16%에 대한 풋옵션 행사를 위해 예보와 분쟁 중이기도 하다.
만약 한화의 말처럼 풋옵션 권한을 모두 찾아올 경우 한화의 대생 지분은 67%에 이르러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계열사들이 나눠받는 부담은 만만치 않다.
아직 구체적인 비용 분담이 정해지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나오지 않았지만 삼성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지분 17% 인수에 약 5400억 원의 자금이 들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만약 한화가 예보 지분 16%까지 풋옵션을 행사하게 된다면 계열사들은 대생 인수에 1조 원이 넘는 돈을 더 쏟아부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한화그룹은 이런 저런 이유로 돈 쓸 구멍이 계속 생기고 있다. 한화 지배구조의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계열사인 한화석화는 지난 2월 8일 공시를 통해 서울 장교동 한화그룹 사옥을 3500억 원에 되사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이 건물은 지난 2002년 한화가 대생 인수를 전후해 현금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기업구조조정 펀드인 코크렙제1호 기업구조조정부동산투자회사에 1850억 원에 팔았던 것이다. 펀드 청산을 앞두고 콜옵션을 행사해 이 건물을 되사는 것이다.
한화의 간판인 (주)한화가 한국바스프의 한화석화 지분을 되사는 데 들인 1200여 억 원 중 자기 돈은 800억 원, 나머지는 빌린 것이었다. 다른 그룹에 비해 비교적 부채비율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화로선 대생 인수 후폭풍이 인수 5년이 지난 현재도 힘겨울 법한 일이다.
물론 대생이 한화에 부담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한화에서는 대생을 구조조정의 지렛대로 활용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이번 대생의 한화투신운용 인수도 한화 쪽의 부담을 덜어준 것으로 보인다.
한화증권은 한화계열의 지분이 28.47%에 불과하다.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있는 것. 때문에 이번 한화투신의 대주주 변경도 이런 사정을 감안해 자금력이 있는 대생이 한화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한화증권의 영업용 순자기자본비율은 494% 정도로 업계평균 573.7%에 크게 못미친다. 대주주의 ‘투자’ 등 현금유입이 절실했던 것. 이것이 한화증권의 대주주인 김승연 회장이 본인이나 한화석화, 한화리조트의 추가부담 없이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하려면 대생의 지분 투자가 필요하다는 전망의 근거다. 대생이 한화투신을 인수하면서 현금유입이 이뤄지고 대생을 중심으로 한 금융지주회사 체제도 자연스럽게 출범하게 되는 것.
그러나 이를 위해선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예보와의 관계가 여전히 껄끄럽다는 점이다. 대생은 지난 2월 14일에도 자회사인 한화손보(옛 신동아화재)의 452억 원 유상증자에 참여했지만 대주주인 예보가 한화손보의 ‘부실경영’을 지적하면서 ‘경고’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화손보는 지난해 9월 말 지급여력비율이 113.2%로 떨어지는 등 ‘부실화’ 문턱까지 다다라 비상이 걸려 유상증자가 시급했었다. 결국 한화그룹은 대생의 손을 빌려 한화증권과 한화손보의 경영권 방어 및 경쟁력 강화에 나선 셈이다.
증권가에서는 대생이 상장될 경우 지분 매각 등의 방법으로 한화그룹의 현금 유동성이 대폭 좋아지고 계열사 주가에도 청신호가 켜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는 예보와의 분쟁 해결, 생보사 상장 문제의 조속한 해결이라는 전제 조건이 충족될 경우다. 한화그룹이 다른 어느 그룹보다 더 생보사 상장 기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한화그룹이 그룹 지배구조 개편과 현금 유동성 확보라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갈지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