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국립발레단 ‘경쟁 구도’ 형성…전민철·박세은·김기민 등 화려한 캐스팅 화제
클래식 발레의 여러 인기 레퍼토리들,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 또는 동화를 원작으로 하는 ‘신데렐라’나 ‘호두까기 인형’이 ‘Girl Meet Boy’라는 다소 순진한 스토리텔링을 견지하고 있다면, ‘라 바야데르’에는 권력과 야망, 배신이라는 성인들의 코드가 개입되어 있다. 많은 발레작품에서 우유부단한 남자 주인공과 강력한 연적의 존재는 다소간 비중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끊임없이 변주되며 소비되는 캐릭터들인데, ‘라 바야데르’에서는 남자 주인공에게 출세욕을 부여해 그의 선택에 현실적인 개연성을 강화한다.
인도의 힌두사원을 배경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각관계가 완성된다. 아름다운 무희 니키야(국립발레단 표기는 ‘니키아’)는 용맹한 전사 솔로르와 연인 사이지만 둘의 사랑은 신분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에 니키야를 탐내고 있는 최고승려 브라민은 둘의 사랑을 알게 되자 앙심을 품고 솔로르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한다. 솔로르의 용맹스러움을 기꺼워한 라자왕은 그를 사윗감으로 점찍는다. 브라민은 왕에게 독대를 청해 솔로르와 니키야의 관계를 폭로한다. 하지만 라자왕의 결정은 솔로르가 아닌 니키야를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민과 라자왕의 대화를 몰래 엿들은 감자티 공주 역시 연적인 니키야의 존재를 알게 된다.
감자티 공주에게 불려간 니키야가 공주의 방에서 발견한 것은 부마로 낙점된 연인의 거대한 초상화였다. 네까짓 게 어디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를 올려다보느냐고 경멸의 시선을 감추지 않는 감자티 앞에서 니키야의 감정이 그만 폭발하고 만다. 순간 니키야는 한낱 사원의 무희일 뿐인 자신의 신분도, 눈앞의 상대가 자신의 목숨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쥔 이 나라의 공주라는 사실도 잊고 자신의 사랑을 강탈해간 침략자를 향해 단검을 빼어든다. 이는 고전발레의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여성 간의 대결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니키야는 그저 잔인한 운명 앞에서 소리도 못 내고 울음을 삼키기 마련인 다른 여주인공과 뚜렷이 대비된다.
감자티가 처음부터 니키야에 대한 경멸과 적의를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니키야를 불러들여 보석 장신구를 하사하는 회유책을 쓰는데, 이는 상대방의 환심을 사는 방법인 동시에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확인시켜 상대방이 자신을 넘보지 못하도록 무릎을 꿇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사회적인 맥락보다는 인물 간의 감정 교류를 통해 극이 진행되는, 그래서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인물들이 대부분인 발레에서 이 장면은 매우 도드라진다.
이제는 하도 많이 본 탓에 식상한 클리셰가 되어버렸지만, 드라마에서 재벌 2세를 사랑하게 된 가난한 여주인공이 필연적으로 거치는 코스는 그 재벌가의 사모님으로부터 한 밑천 잡을 수 있는 두둑한 봉투를 받는 것 아니었나. 그래서 무용수들이 현실에선 불가능해 보이는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해내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판타지가 거리낌 없이 개입되는 발레라는 장면에서 이국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작품은 인간의 현실적인 치부를 건드리고 있다.
그러나 어떤 발레 안무가도 마음씨 고운 여주인공이 질투에 눈이 멀어 살인을 행하도록 허락하지는 않는 법, 감자티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시녀 아야의 도움으로 간신히 니키야의 칼을 피한다. 이제 감히 공주를 위협한 대가로 더 큰 위험에 처한 것은 니키야다.
왕궁에서는 솔로르와 감자티의 호화로운 결혼식(혹은 약혼식)이 열린다. 이 장면은 전막 발레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춤의 성찬이 벌어지는 장이라 할 것이다. 부채춤, 앵무새춤, 물동이를 머리에 얹은 마누의 춤, 전사들의 북춤, 힌두사원에서 온 무희들의 춤과 황금신상의 춤이 차례로 펼쳐지며 시각적 쾌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솔로르와 감자티의 그랑파드되가 끝나면 수인(囚人)처럼 니키야가 춤을 추기 위해 등장한다. 여기서 니키야는 꽃바구니를 들고 춤을 추는데, 니키야에게는 솔로르의 선물이라고 귀띔해준 이 꽃바구니는 사실 라자왕이 보낸 것으로, 그 안에는 독사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감히 왕국의 부마가 될 전사를 탐낸 죄인인 니키야는 춤이 끝난 뒤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꽃바구니를 들고 춤을 추는 니키야의 감정은 복잡하게 변한다. 사랑하는 솔로르의 결혼을 축복하며 춤을 추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탄, 그러나 꽃바구니를 선사한 솔로르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뱀에게 물렸을 때의 놀라움과 배신감까지, 춤을 추는 동안 드라마틱한 그 모든 감정을 물 흐르듯 끊기지 않고 이어가야 하는 무용수에게는 연기력의 또 다른 시험대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라민은 해독제를 주며 다시 한번 구애하지만 니키야는 거절하고 죽음을 택한다.
니키야의 죽음으로 비탄에 빠진 솔로르가 환각제를 마시고 잠든 동안 펼쳐지는, ‘라 바야데르’의 백미인 3막 ‘망령들의 왕국’은 발레단 전체의 역량을 증명하는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건축물 같은 조형미를 뽐내는 일사불란한 백색 군무 탓에 비평가들은 ‘지젤’, ‘백조의 호수’와 더불어 이 ‘라 바야데르’를 함께 ‘3대 백색 발레’로 곧잘 묶는다. 하지만 ‘지젤’의 2막이나 ‘백조의 호수’의 2막과 4막이 주인공의 내면의 드라마와 어우러져 사랑과 구원의 장이 되는 것에 비해 ‘라 바야데르’의 백색 군무는 시각적 스펙터클에 좀 더 충실하다. 경사진 무대를 한 걸음씩 내려오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한 군무는 그야말로 백색 발레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이번 ‘라 바야데르 대전’은 공연의 화제성은 물론 캐스팅에서도 화제가 됐다. 유니버설발레단은 마린스키발레단 입단이 예정되어 있는 발레리노 전민철을 객원 주역으로 캐스팅해 일찌감치 매진을 이루어냈고, 국립발레단은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박세은과 마린스키발레단의 김기민을 나란히 캐스팅해 최단기 전석 매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박세은과 김기민은 2010년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서도 객원 주역으로 무대에 오른 바 있어 14년 만의 이 무대가 더욱 기대를 받고 있다.
윤단우는 주로 사람과 사랑과 삶에 관한 생각의 편린들에 대한 글을 쓰며, 댄서가 반짝이는 무대와 숨찬 마감이 기다리는 데스크를 오갑니다. 쓴 책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죽은 여자다’, ‘기울어진 무대 위 여성들’, ‘여성, 신체, 공간, 폭력’ 등이 있으며, 여성주의 공연 뉴스레터 ‘위클리 허시어터’를 매주 발행하고 있습니다.
윤단우 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