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굴곡 만드는 스타일, 결국은 이번엔 해피엔딩”
2017년 KIA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을 때 박찬호는 군 생활관에서 TV로 소속팀의 우승을 지켜봤다. 박찬호로선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올 시즌 한국시리즈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고, 홈 구장 만원 관중 앞에서 선수들과 함께 우승 세리머니를 즐겼다.
화려한 시즌을 마치고 두 딸의 아빠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박찬호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KIA 이범호 감독은 선수들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내면서 박찬호를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박찬호의 플레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약간 건들대기도 한다. 그런데 박찬호처럼 매일 경기에 뛰는 선수는 많지 않다. 선수는 아픔이 있어도 경기에 출전하려는 마음이 있는 게 최고다. 찬호가 우리 팀에서 가장 큰 그릇을 갖고 있다. 찬호 많이 사랑해 주세요.”
나중에 이 내용을 접한 박찬호는 이범호 감독의 진심이 느껴져 울컥했다고 한다.
“감독님이 나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셨다는 게 정말 감사했다. 시즌 중 내가 안 좋을 때도 끝까지 믿고 기용해주셨기 때문에 시즌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감독님과는 선수로, 코치로 그리고 감독님으로 인연을 이어가는 셈인데 신인 때는 이범호 선배님이 눈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다가가기 어려웠다면 선배님이 코치님이 되시고, 감독님으로 우리 팀을 이끌면서 점차 감독님의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선수 시절의 이범호 선배님을 좋아했다면 지금은 감독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박찬호는 시즌 중 이범호 감독이 김도영과 자신을 감독방으로 불러 이런 당부를 건넸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랑 (김)도영이를 불러서 체력 관리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휴식을 많이 줘야 하는데 감독 입장에서 우리를 빼기 어렵다며 다독여주셨다. 감독님이 굳이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되는데 선수에게 팀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모습에 감동한 나머지 도영이랑 서로 의지하면서 더 열심히 경기에 나선 것 같다.”
박찬호는 프로 데뷔 후 여러 감독을 만났지만 선수한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감독은 처음 봤다고 말한다. 이긴 경기를 아쉽게 내줘도, 연패의 늪에 빠져도, 경기 내용이 좋지 않아도 이범호 감독은 선수들에게 별다른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 처한 선수들이 충분히 힘들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못했으면 내일 잘하면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셨다. 김도영, 곽도규 등 나이 어린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거침없이 플레이했던 건 감독님의 배려 덕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는 지도자라는 걸 느낀다.”
박찬호는 2014년 2차 5라운드 50순위로 KIA 유니폼을 입었다. 빼어난 수비 실력으로 입단 첫 해부터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고, 김기태 감독이 KIA 감독으로 선임된 2015시즌부터 1, 2군을 오가며 내야 전 포지션을 경험했다. 박찬호는 당시 타격과 체력에 고민이 많았던 자신에게 꾸준한 기회를 제공하면서 성장을 바랐던 김기태 전 감독을 이렇게 추억했다.
“정규시즌을 마치기 전 광주 롯데전(9월 25일)을 앞두고 김기태 감독님이 시구를 하러 챔피언스필드를 방문하셨다. 경기 전 감독님을 뵈었는데 너무 연로해지신 모습에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더라. 오랜만에 감독님을 봬서 어린아이처럼 좋으면서도 나이 드신 감독님을 보니까 기분이 정말 묘했다. 한국시리즈에서 꼭 우승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킨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분명히 감독님도 TV로 우승하는 걸 지켜보고 크게 기뻐하셨을 것이다.”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눈물을 흘렸던 박찬호에게 그 눈물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면서 “힘들고 서러운 일들도 많았는데 그걸 잘 참고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면서 기쁨과 감동이 뒤섞인 눈물이 나온 것 같다”고 답한다.
박찬호는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는 동안 경기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피칭 머신의 구속을 올린 후 기계 볼 타격 훈련을 반복하면서 삼성과의 1차전을 대비했다.
“1차전 선발 원태인을 상대로 첫 타석부터 초구에 결과를 내겠다고 마음먹고 스윙했는데 그게 파울이 됐다. 나로선 그때부터 뭔가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원래 좌측으로 파울을 많이 치는 타자가 아닌데 계속해서 좌측으로 잘 맞은 파울 타구가 나오더라. 타격감은 좋은데 왜 파울이 나오는지 계속 영상을 보며 연구하고 고민했다. 덕분에 3차전 세 번째 타석부터 좋은 타이밍의 안타가 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이제 됐다’ 싶더라.”
3차전 6회 좌전 안타와 8회 유격수 방면 안타를 때려내며 타격감을 회복한 박찬호는 2-4로 끌려가던 9회초 2사 만루 상황에 삼성 마무리 김재윤을 상대했다. 박찬호는 초구 142km/h의 패스트볼을 받아쳐 3루 선상으로 향하는 날카로운 타구를 생산했지만 아쉽게도 파울 판정을 받았다. 이후 박찬호는 3루수 땅볼로 물러났고, 경기가 그대로 종료되면서 KIA는 3차전을 삼성한테 내주고 만다.
“만약 그 파울 타구가 안타가 됐다면 우승을 확정 짓는 중요한 상황으로 기억됐을 텐데 그 당시에는 그냥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타격감 회복에 위안을 삼아야만 했다.”
1, 2차전 무안타로 마음고생을 했던 박찬호는 3차전부터 5차전까지 매 경기 멀티히트를 기록했고, 5차전에서는 데일리 MVP를 받았다. 그는 생애 최고의 순간들로 가슴에 남아 있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부터 잘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스스로 굴곡을 만드는 것 같다. 나도 좀 평탄하게 살고 싶은데 말이다. 결국 전체 성적은 평범한데 그 속에서 나 혼자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정신없이 시즌을 치르다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돌이켜 보면 모든 장면이 꿈만 같다. 내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다니… 그게 현실이란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박찬호는 올 시즌 134경기 타율 0.307 158안타 61타점 장타율 0.386 OPS 0.749를 기록하며 커리어하이를 이뤘다. 지난해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에서 오지환(LG)에 이어 득표 2위를 차지했던 박찬호가 올시즌에는 SSG 박성한과 2파전을 형성하는 중이다. 박찬호는 우승 프리미엄이, 프리미어12 대표팀에서 활약 중인 박성한은 국가대표 프리미엄이 있다.
타격은 박성한이 3할 타율-10홈런 달성과 장타율(0.411) OPS(0.791)에서 박찬호를 근소하게 앞서고 있다. 안타와 도루는 박찬호가 우위를 보이지만 소속팀 풀타임 주전 유격수로 수비 이닝은 박성한이 1115이닝, 박찬호가 1120⅓이닝이고, 수비 실책은 23개로 동률이다. 스포츠투아이가 계산한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은 박성한이 2.72로 2.37의 박찬호에 앞섰다. 누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해도 이해가 될 정도의 ‘박빙’이다.
2년 연속 3할을 이룬 유격수 박찬호는 과연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수 있을까. 박찬호는 그 또한 운명에 맡기겠다고 말한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