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 먹으면 기사 얼마든지 만들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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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이익을 내고 적자를 내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지만 국민들에게 호의를 잃으면 회사가 없어지기도 하더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그룹계열사 홍보책임자 교육 때 했다는 말이다. 이 회장의 이런 생각을 반영하듯 삼성은 유달리 여론에 민감하다. 특히 언론에 대해서는 ‘과도하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올 만큼 ‘개입’이 잦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삼성의 홍보 마인드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문건이 최근 등장했다. <삼성전자 홍보전략 문건>으로 불리는 이 문서는 합숙교육 교재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며 삼성이 언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를 알려주는 내용들이 담아 눈길을 끈다.
이 중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언론·홍보 관련 부분은 5개의 섹션으로 나눠져 있다. ‘홍보가 뭐예요?’라는 원론적인 내용으로 시작되는 이 문건은 ‘홍보는 왜 하나요?’ ‘어떻게 하나요?’ ‘기자를 만났어요!’ ‘큰일 났어요!-위기관리’ 등의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눈길을 끄는 대목은 ‘기자를 만났어요!’라는 섹션이다. 제목부터 신입사원 교육용으로 쉽게 풀어쓴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삼성은 이 자료에서 “기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 “오프더레코드란 없다” “언론과의 싸움은 백전백패”라며 신입사원들에게 ‘입조심’을 강조한다.
특히 언론과 기자의 특성을 설명한 부분에는 “Power의 자부심=권력” “때로는 무책임보도의 유혹에 빠진다”거나 “dog저널리즘, 냄비저널리즘”등 원색적인 표현도 등장한다.
그러면서 언론에 잘못 대처할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사례로 제시했다. 지난 1997년 3월 중국 ‘소비자의 날’에 국영방송인 CCTV에 ‘삼성전자 AS 수준이하/무책임한 회사’라는 기사가 방영된 사례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CCTV와 접촉한 담당자가 방송사의 관련내용 취재에 불친절하게 대응했으며 이로 인해 악의적인 기사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문건에 따르면 이 내용이 방송된 후 중국에서 삼성전자의 매출이 15% 감소했다. 문건은 “베스트초이스=홍보팀에 문의하세요”라는 결론을 제시하며 대언론창구를 홍보팀으로 단일화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자료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홍보철학도 소개하고 있다. 문건에 따르면 이 회장은 “홍보란 윗사람의 말을 아래로 12시간 내로, 또 말단의 정보를 24시간 내지 48시간 내로 회장까지 전달되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언론관을 갖고 있다. 그룹 차원의 일사불란한 홍보시스템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회장의 철학을 반영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삼성전자는 언론홍보, 광고 협찬, 스포츠 마케팅, 사내 커뮤니케이션 등으로 업무가 나뉜 자신들의 홍보팀도 소개하면서 신입사원들에게 적극적인 자세로 홍보업무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면서 삼성은 뉴미디어인 인터넷에 대응하기 위해 24시간 뉴스룸과 조기경보시스템을 가동중이라고 밝혔다. 또 직원 한명 한명을 홍보의 최소단위로 설정해 ‘전 직원의 홍보맨화’를 요구하고 있다. 모든 임직원이 홍보소재를 찾아내는 기획홍보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위기관리의 출발점이라는 설정이다.
삼성전자는 또 문건을 통해 ‘출세하려면 홍보를 알아야 한다’는 암시를 내비친다. ‘P나게 R려라’라는 항목에는 ‘내가 한 일을 아무도 모른다면?’ ‘미디어를 잘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덧붙여 일본 소니의 이데이 전 회장은 홍보팀 출신이며 스트링거 현 회장은 CBS 출신임을 소개하고 있다.
홍보의 효과에 대해서는 ‘신문기사의 홍보효과가 광고대비 10배’라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조사결과를 제시하며 “10번 광고보다 기사 한 줄이 낫다”고 대언론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기사의 상당부분이 홍보활동의 결과물이라는 다소 자의적으로 보이는 통계치도 거론했다. 삼성전자는 이 문건에서 “<뉴욕타임스> 및 <워싱턴포스트> 기사의 60%가 홍보활동의 결과”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월스트리트저널>의 경우 “기사의 70%가 홍보활동의 결과이며 나머지 30%도 보도자료+새로운 사실 첨가”라고 설명한다.
삼성전자의 이러한 언론관은 자신들이 원하면 언론의 기사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문건은 ‘이러한 것들이 기사가 된다’라는 항목에서 ‘새로운 것, 참신한 것(최초 최대 최고)’ ‘정보가 되는 것’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 ‘시의적절한 것’ 등을 기사의 재료로 제시하며 “홍보에 알려주면 기사로 만들어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굵고 큼지막한 글씨로 새겨놓고 있다.
문건에는 홍보팀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의 사례도 다수 등장한다. 지난해 9월 삼성전자가 야심차게 내놓은 신형 휴대전화 ‘울트라 에디션’의 비방 동영상이 인터넷에 나돌 당시 이를 역으로 이용해 언론에 ‘경쟁사의 음해공작설’이 등장하게끔 유도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건은 ‘휴대전화 부러뜨리기 동영상 유포…날벼락 삼성 누가? 왜?’ ‘삼성슬림폰 괴동영상에 곤혹’ 등의 언론 기사를 소개하며 악성 여론을 조기에 차단한 성과로 평가했다.
대언론 위기 대응의 기본원칙으로는 “CEO가 적극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라” “언론 훈련을 받고 대변인을 선정하라” “평소 제3자를 관리, 위기 때 우군으로 활용하라” 등이 제시돼 있다.
이 자료는 MBC 앵커 출신인 이인용 삼성전자 홍보담당 전무가 제안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005년 5월 MBC에서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긴 이 전무는 지난 1월 말 국내홍보를 사실상 총괄해왔던 김광태 전무가 안식년 휴가로 자리를 비우면서 실질적인 삼성전자의 홍보책임자가 됐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