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죽였던 ‘모피아’ 레임덕 타고 ‘훨훨’
▲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왼쪽)와 박병원 신임 우리금융지주 회장. 최근 이헌재 사단의 부활이 눈에 띈다. | ||
‘모피아’ 혹은 ‘이헌재 사단’으로 불리는 금융권 인사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재록 게이트’와 ‘외환은행 불법매각 사건’ 등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며 검찰의 수사를 받는 등 세력이 뿌리째 흔들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근 이들은 “이제는 한물간 것 아니냐”던 세간의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금융기관의 새로운 수장을 뽑는 인사에서 잇달아 CEO자리를 꿰차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헌재 사단의 부활 움직임은 이미 올해 초에 감지됐다. 검찰의 외환은행 매각 과정 수사가 외환은행 매각 드라이브의 ‘구실’이 됐던 금융권 구조조정과 매각을 주도한 몸통을 파헤치기는커녕 실무급 인사의 사법처리에도 힘겨워했다. 게다가 박병원 전 재정경제부 차관과 유재한 전 재경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이 각각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주택금융공사 사장에 도전,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인사들을 물리치고 회장과 사장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그동안 모피아 출신의 자리로 인식되지 않았던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황영기 전 회장에 이어 또 다시 이헌재 사단으로 분류되는 박 회장이 차지함으로써 모피아의 ‘영토확장’으로까지 불리고 있다.
주택금융공사 사장 자리는 자리의 성격상 ‘당연히’ 모피아의 몫으로 분류될 만하지만 2004년초 공사 출범 때 청와대는 민간전문가를 발탁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걸고 주택은행 부행장 출신의 정홍식 사장을 선임, 모피아를 배제했었다. 당시 주택금융공사 사장 후보에는 재경부 출신인 김우석 전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이 출마, 유력한 사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막판에 고배를 마셨었다. 그런데 이번에 유재한 사장이 선임됨으로써 모피아는 우리금융지주에 이어 또 하나의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셈이 됐다.
얼마 전 연임에 성공한 강권석 기업은행장 역시 재경부의 전신인 재무부 출신. 강 행장은 은행장 재선임을 앞두고 장병구 수협 대표, 이우철 금감원 부원장 등 쟁쟁한 인사들의 도전을 받았지만 무난히 연임에 성공했다.
이헌재 사단의 부활을 알리는 ‘축제’의 대미는 박해춘 우리은행장 내정자가 장식했다. 손쉽게 연임할 수 있었던 LG카드 사장 자리를 스스로 내던지고 ‘평생 소원’이라던 은행장 도전에 나선 박 내정자는 청와대 개입설 등 온갖 루머가 난무한 끝에 결국 차기 우리은행장으로 결정됐다.
박 내정자의 선임이 사실상 이헌재 사단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방점이 되는 이유는 그의 인선 과정에서 벌어졌던 세력다툼 때문이다. 그는 불같은 추진력으로 부실 기업을 정상화시킨 수완을 보여줬지만 은행경험이 전무하다. 그럼에도 그는 행장 선임 초기 단계부터 우리은행 내부 인사인 이종휘 수석부행장 등을 밀어내고 은행장에 선임될 것이 확실시 됐었다.
▲ (왼쪽부터)유재한 주택금융공사 사장, 강권석 기업은행장, 박해춘 우리은행장 내정자 | ||
김 차관은 당시 “내가 박해춘 씨를 밀고 있다는 좋지 않은 소문을 나도 듣고 있다”며 “내가 그럴 정도로 파워가 있긴 하냐”고 되물었다. 이어 그는 “요즘 행장추천위원회에 소속한 위원들을 보면 누구 하나 정부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누굴 밀어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재경부의 다른 인사 역시 “김 차관이 박 전 사장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순 있어도 드러내놓고 그를 위해 힘을 쓸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며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모피아들이 속속 기관장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나서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인사막판에는 청와대 특정 인사의 이름까지 거론되면서 박 내정자가 “청와대로부터 비토를 당하고 있다”는 소문과 “청와대 재가를 얻었다더라”는 정반대의 소문이 동시에 나도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었다.
그러나 결과는 결국 박 내정자의 선임으로 결론이 났다. 이러한 선임과정은 노조를 비롯한 반대세력이 ‘낙하산 인사’라며 그를 비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행추위가 정통 뱅커들을 제치고 박 내정자를 고르기까지 다른 정치적인 배경이 없었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논리다. 우리은행 노조가 박병원 회장보다 박해춘 내정자에게 더 반감을 갖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과거 주택금융공사 사장, 예금보험공사 사장 등 모피아 인사들의 텃밭으로 인식됐던 영역에서 참패를 거듭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이런 분위기는 이미 금융권 현업 종사자들에게는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확연한 양상이 됐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참여정부 들어 모피아 배제 원칙이 지속되면서 재경부 인사 적체가 너무 심해졌다는 점을 청와대도 일부 인정하는 것 같다”며 “다만 인사라는 것은 실제로 뚜껑을 열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업이 갈수록 고도화하면서 탄탄한 실전능력과 해외시장 상황에도 밝은 전문경영인을 요구하는 추세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또 모피아냐”는 업계의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심사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일부 금융공기업의 경우 관료출신보다 민간출신 전문가가 기용되면서 효율성이 커지고 시장친화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면서 “출신이나 정치적 고려를 떠나 첨단 금융분야에 해박한 식견과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국책금융기관과 금융공기업 수장 발탁의 최우선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