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3일 강금실 법무부 장관(가운데)이 배석한 가운 데 노무현 대통령이 송광수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 하고 있다. | ||
아무리 노 대통령이 ‘당정분리’를 강조하고 여당이 제 위상을 찾고 있지 못하지만 여당 대표의 혐의 사실이 연일 새어나오고 검찰이 사전영장 청구까지 한다는 것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 즉 검찰이 정치권 수사와 관련해서는 권력과 아무런 조율을 거치지 않고 법대로 원칙대로 수사하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정 대표의 사법처리가 노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당 창당 등 정계개편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이 같은 설을 뒷받침한다. 물론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 대표가 신당 창당과 관련, 노 대통령 코드에 어긋나는 행보를 했고 이에 따라 정 대표의 제거가 오히려 노 대통령의 정치적 구상의 실현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그러나 김원기 고문과 함께 신주류의 대표격인 정 대표가 수뢰 등의 혐의로 사법처리될 경우 신주류 나아가 신주류가 주축이 될 신당의 도덕성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최근 정치권에서는 “검찰을 이대로 두다간 검찰이 정치권을 좌우할 것”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대권 후보도 바꿀 수 있을 것” 등의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다.
사실 노 정권의 검찰 통제력 상실 조짐은 이미 나라종금 수사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염동연씨가 구속된 데 이어 안희정씨에 대한 검찰의 첫 번째 영장이 기각되자 야당측은 검찰이 고의적으로 영장이 기각되도록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이 보강수사를 통해 다시 안씨에 대해 영장을 청구할 때도 야당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검찰이 일단 영장을 청구해 자신들에게 쏠릴 비난은 피하되 기각될 영장을 청구함으로써 청와대의 눈치를 알아서 살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검찰 수사팀은 이 같은 야당의 비난에 대해 ‘세상이 바뀐지 모르는 소리’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이제 어떤 권력이든 5년이 지나면 교체될 수 있고 이는 권력 눈치보기 수사를 했다가는 5년 후에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수사팀 자체가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5년 내에 검찰총장을 노리면 모를까 누가 눈치보기 수사를 하겠나”라고 말했다.
검찰 수뇌부들도 이 같은 검찰 내부의 분위기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대검의 한 고위간부는 “요즘은 누가 수사 진행 상황을 알아봐달라고 해도 수사를 담당하는 검사나 해당 검찰청 검사장에게 전화도 못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위에서 수사에 관여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이미 검찰 내에서는 “수사에 관한 한 검찰은 이미 강금실 법무장관의 손을 떠났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야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보력의 우위에 있는 여당 의원들도 정치권 사정 수사에 관한 한 ‘권력의 배려’나 ‘검찰의 알아서 눈치보기’는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요즘 정치권에서는 30대의 아무개 검사가 저승사자로 통한다”며 “이제 진짜 권력은 청와대나 정치권, 국정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칼자루를 법의 이름으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검찰에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사실 노 정권의 검찰 통제력 상실은 검찰이 갑자기 새로운 권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노 정권이 자초한 것이다. 노 대통령이 취임 초 검찰의 독립을 강조할 때만해도 검찰이나 정치권은 역대 정권 초기의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했다. 과거 기준에서 보면 권력을 유지하고 정권을 운영하기 위해 검찰권을 포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소수 정권이다. 국회는 야당이 과반수를 점하고 있고 언론계의 메이저 신문사들은 노 정권과 대립하고 있다. 재계 역시 대기업 등 주체 세력은 노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다. 이런 소수 정권이 합법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검찰권을 방기한다는 것은 그 의도가 아무리 순수했더라도 확실히 ‘도박’이었다.
과거 ‘군’이라는 강력한 무력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군사정권조차 검찰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국정원이나 경찰과 달리 한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를 자부하는 검찰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인맥과 법 논리를 내세워 정권의 요구를 무조건 추종하지 않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이에 따라 군사정부는 검찰의 ‘아킬레스 건’인 인사를 통제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하에서 TK(대구·경북) 출신이 검찰의 핵심 요직을 장악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즉 검찰에게 정권과 권력을 나눠 갖는다는 인식을 줌으로써 정권에 대한 자발적 협조를 유도한 것이다. 검찰 내에서는 흔히 ‘서울지검장’이 검찰의 꽃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권력과 경제의 80%가 집중된 수도권의 모든 수사를 총괄할 뿐 아니라 차기 총장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측면에서 보면 서울지검장은 검찰통제를 위한 핵심 요직이다. 서울지검장 산하에 있는 1백60~1백70명에 이르는 검사들이 각자 무슨 수사를 하고 그 수사가 권력의 기반을 흔드는 사건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대검 중수부는 대통령의 하명사건을, 서울지검 특수1부는 검찰총장의 하명사건을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검 중수부는 거의 대부분 예측 가능한 사건,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수사를 담당하는 검사가 중견이어서 정치적 조율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울지검의 경우 소장 검사들은 나름대로 소명의식도 있고 최소한 장관이나 의원 한 명 정도 ‘잡아넣겠다’는 공명심도 충만하다. 이에 따라 권력형 비리사건을 다루는 서울지검 특수부 부장 특히 특수1부장은 젊은 검사들 사이에서는 ‘신이 내린 자리’라고 불린다. 노태우 정권까지 서울지검 특수1부장 자리에는 단 한 차례도 호남 출신이 임용된 적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권력의 검찰통제 방식은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다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주선 의원이 호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동기 중 선두주자라는 이유로 PK(부산·경남) 정권하에서 서울지검 특수1부장에 임용된 것이 대표적 예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정권하에서도 여전히 대통령과 같은 지역 출신들이 요직을 장악했다. 김대중 정권하에서 동기 중 선두를 달렸거나 요직을 두루 거친 PK 출신 검사들이 5년 동안 인사에서 몇 차례 쓴잔을 마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열리면서 이같이 지역에 근거한 통제는 거의 사라지고 ‘노 대통령과의 코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노 대통령의 코드’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검찰의 기존 질서와 권력과의 관계를 허무는 것이다. 따라서 그 코드에 맞춘 인사는 권력의 검찰 통제를 약화시키는 인사가 될 수밖에 없다.
대검의 경우에도 15회의 김종빈 대검차장이 13회의 김원치 대검 형사부장, 14회의 유창종 마약부장을 지휘하게 됐다. 이 같은 서열 파괴는 검사동일체 원칙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는 검찰총장이 검찰을 일사불란하게 장악함으로써 권력의 검찰 통제를 가능케 했던 기반을 허무는 셈이 됐다.
물론 이 인사에서 노 대통령과 같은 지역인 PK 출신들이 대거 요직에 발탁됐다. 송광수 검찰총장,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문영호 대검 기획조정부장 등이 대표적 인사다. 이밖에 검사장에 승진한 6명 중 부산고 출신이 3 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미 권력-검찰, 수뇌부-일선 검찰의 수직적 통제 기제가 무너진 체제하에서 PK 출신이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는 현저히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인사 외에 청와대가 검찰을 통제하는 방식은 검찰과 청와대 간에 ‘핫 라인’을 개설하는 것이다. 검찰 내부 분위기가 아무리 바뀌고 통제 기제가 무너졌다 하더라도 권력기관은 생래적으로 권력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다. 권력을 유지 강화해야 자신들의 입지도 강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정권은 사실상 이 같은 통로 개설을 포기했다. 집권 초기 문재인 민정수석은 전임 수석으로부터 업무인계를 받는 과정에서 검찰 간부 출신을 반드시 수석실에 둘 것을 권유받았다. 청와대가 직접 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검찰 내부사정에 정통한 검찰 간부 출신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조율이나 통제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문 수석은 결국 이 권유를 수용하지 않았다. 현재 민정수석실에는 Y검사가 사표를 제출한 뒤 행정관으로 근무중인데 Y검사의 검찰 내 위상 등을 감안하면 이 같은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김대중 정권까지 대검과 청와대 간에 설치돼 있던 직통 팩스마저 현 정권에 접어들면서 사라졌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 청와대측은 검찰의 수사진행 상황은 법무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고 있으며 그나마 특수한 사건에 대해 청와대측이 요청해야 보고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정 대표 사건을 둘러싸고 청와대가 언론보도 3~4일 전 정 대표 수사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사전 조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이 사전에 수사사실을 인지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검찰측과 수사 수위나 방향을 조절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검찰 수사 실무진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청와대가 법무부를 통해 검찰 수뇌부와 사건 문제를 협의했다고 하더라도 검찰 수뇌부가 이 사실을 수사팀에게 알리지 않는 한 사전 조율은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지난 11일 열린 민주당 의총에서는 정 대표의 4억원대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와 관련, 때 아닌 ‘검찰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신주류 핵심인 이재정 의원조차 “검찰이 여당 대표를 수사하면서 언론플레이를 통해 공개적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검사 출신인 함승희 의원은 아예 “검찰총장의 국회출석을 제도화하자”고 주장했고 역시 같은 검사 출신인 박주선 의원은 “일련의 검찰사태와 관련해 당내 비상대책기구를 설치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야당의 의총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 이날 민주당 의총은 권력과 검찰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적어도 청와대측은 여전히 현재의 상황을 검찰의 독립성 확대라는 개혁의 과도적 현상으로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검찰 수뇌부 일부는 여전히 권력의 눈치를 보고 있고 권력의 의중을 검찰 조직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인식처럼 검찰은 이미 청와대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독립성을 확보해나가고 있다. 어쩌면 정치권의 우려대로 이미 청와대가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검찰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막상 청와대가 “이번만큼은 검찰권을 통제해야겠다”고 나설 때는 이미 손아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더구나 법과 제도가 정치자금과 정치권력 행사의 투명성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검찰권만 독립됐을 경우 생기는 권력형 비리사건과 검찰권 독립 간의 갭은 그 갭이 메워질 때까지 상당한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검찰 독립성 확보를 위한 권력의 결단이 당분간 권력의 수족을 자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심장부를 겨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영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