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전체 2루타 1위 등 공·수·주 맹활약…현지 팬클럽 ‘후리건스’ 등장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은 시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두르고 있는 이정후가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을 정도다. ‘ESPN’은 10일 2025시즌 타이틀 예측 관련해 이정후가 내셔널리그 타격왕에 오를 것이며 MVP 투표에서도 5위권 내에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신시내티 에이스 헌터 그린도 감탄
4월 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오라클 파크에서 열린 2025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와의 원정경기에 선발 등판한 신시내티의 에이스 헌터 그린은 이날 8⅔이닝 4피안타 1볼넷 7탈삼진 무실점 호투로 신시내티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샌프란시스코 타선은 헌터 그린을 상대로 좀처럼 공격의 물꼬를 트지 못했다. 그런 그를 깜짝 놀라게 한 선수가 이정후였다. 6회말 2사 1루 타석에 들어선 이정후는 헌터 그린의 3구째 낮게 들어오는 99.6마일(160.3km/h)의 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우중간으로 큼지막한 타구를 날렸다. 맞는 순간 홈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우중간 펜스까지의 거리가 415피트(126.5m)로 유독 깊은 곳으로 향한 타구라 우중간 워닝 트랙 앞에서 우익수에게 잡혔다.
헌터 그린은 팀이 2-0으로 앞선 9회말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9회말 2사까지 투구수 91개로 2022년 이후 커리어 두 번째 완봉승까지 아웃카운트 하나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정후는 헌터 그린과 풀카운트 승부 끝에 7구째 포심 패스트볼을 잡아당겨 우측 라인드라이브 안타로 연결했다. 이어 맷 채프먼에게도 볼넷을 허용한 헌터 그린은 결국 교체됐다. 그렇게 헌터 그린의 완봉승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날 샌프란시스코는 0-2로 패하며 7연승이 마감됐지만 이날 최고의 피칭을 선보인 양 팀 선발 투수인 로건 웹, 헌터 그린 외에 야수 중에선 유일하게 이정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00마일을 던지는 사이영상 후보 상대로 홈런성 타구에 이어 완봉을 저지한 안타를 터트린 이정후는 이날 기자들의 주요 취재 대상이 됐다.
헌터 그린은 경기 후 만난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이정후의 안타로 완봉이 무산된 것과 관련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면서 “정말 좋은 타격이었고, 좋은 타자다. 그의 밸런스를 흔들어보려 했는데 아주 잘 쳤다”면서 상대 팀 선수를 높이 평가했다.
이정후의 6회 홈런성 타구 관련 질문을 받은 그는 “와 그건 정말…. (홈런이 안돼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표현했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소리도 좋았고, 직감적으로 ‘아 이거 큰 타구다’ 싶었다. 경기 내내 나한테 흐름이 이어졌는데 그 타구 하나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었다. 이건 결국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던졌다는 게 정말 좋았다.”
이날 오라클파크에는 이정후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정후 리! 정후 리!”를 외치는 관중들의 함성이 가득 울려 퍼졌다.
이날 경기 후 샌프란시스코의 선발 투수였던 로건 웹은 “이정후는 자신의 능력 중 극히 일부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즐거운 것은 그가 계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밥 멜빈 감독도 이정후에 대한 칭찬을 이어갔다. 밥 멜빈 감독은 “이정후는 정말 훌륭한 야구를 하고 있다. 그는 잘 달린다. 점프도 좋다. 훌륭한 수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타격도 잘한다”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2경기 무득점에 그쳤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4월 10일(한국시간) 신시내티 레즈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역전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 드라마의 시작은 이정후였고, 마무리는 마이크 야스트렘스키의 역전 투런 스플래시 히트였다.
첫 번째 타석에서 상대 선발 닉 마르티네즈의 체인지업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이정후는 팀이 0-5로 뒤진 4회말 윌리 아다메스의 볼넷으로 만들어진 무사 1루에서 3구 바깥쪽으로 벗어나는 체인지업을 잡아당겨 우익선상에 떨어지는 3루타를 터트렸고 윌리 아다메스는 홈을 밟았다. 이 3루타는 이정후의 메이저리그 첫 3루타이자 샌프란시스코의 이번 시리즈 첫 득점이었다.
이정후는 6회 선두타자로 나서 마르티네즈의 똑같은 체인지업에 1, 2간을 꿰뚫는 빠른 타구로 두 번째 안타를 기록한다. 이 안타는 신시내티의 닉 마르티네즈를 무너트리는 시발점이었다. 이정후는 후속 타자 마이크 야스트렘스키의 2루타 때 3루까지 진루한 뒤 상대 폭투를 틈타 득점을 이룬다.
샌프란시스코는 6회에만 무려 4점을 뽑아 단숨에 5-6으로 추격에 나섰다. 이정후는 7회말 선두 타자로 나서 바뀐 투수인 우완 스콧 발로를 상대로 2루타를 뽑아냈다. 1루를 돌아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전력 질주한 뒤 몸을 아끼지 않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세이프를 이뤘다.
샌프란시스코는 8회말에 터진 윌머 플로레스의 좌월 솔로홈런으로 6-6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 10회말 승부치기에서 마이크 야스트렘스키의 끝내기 홈런으로 8-6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경기 후 샌프란시스코의 밥 멜빈 감독은 이정후를 향해 “마지막 타석에서 때린 공도 좌중간 갭으로 가는 좋은 타구였다”면서 “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강한 타구를 날리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멜빈 감독은 이정후의 타율을 정확히 기억해내곤 “상대가 좌완이냐 우완이냐에 상관없이 좋은 타격을 보여주고 있다. 주루도, 수비도 지금 아주 좋은 야구를 하고 있다”며 이정후의 활약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정후를 사랑하는 팬들
지난 4월 8일 오라클파크 3루측 관중석 상단에는 ‘이정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한 30여 명 정도가 ‘HOO LEE GANS(후리건스)’라는 문구가 적힌 셔츠와 바람을 형상화한 주황색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이정후가 타석에 들어설 때나 호수비를 펼칠 때 단체로 율동을 펼치며 “정~후~리”를 외쳤다.
‘일요신문’에서 이 응원단의 리더인 카일 스밀리 씨를 현장에서 만났는데 스밀리 씨는 “우리는 모두 이정후를 좋아하는 친구들”이라고 소개했다.

‘HOO LEE GANS(후리건스)’ 응원단은 방송 중계 카메라로 여러 차례 비췄고, 오라클파크 전광판을 통해서도 소개되면서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 이정후 응원단은 이날 경기 후 기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고, 경기 후 만난 이정후에게 이들의 응원 영상을 보여준 한 외신 기자는 “이토록 자신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물었다. 이정후는 “더 많은 팬들이 생기도록 열심히 하겠다”라고 답했다.
오라클파크에는 한국에서 온 팬들도 정말 많았다. 그중 ‘태교 여행’을 온 한 부부는 이정후의 키움 히어로즈 시절부터 팬이었다고 한다. 임신 후 ‘태교 여행’삼아 이정후를 보러 올 정도로 이정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이정후는 VIP 프리게임투어로 필드를 찾은 그 부부를 만났고, 준비한 공과 유니폼 등에 정성스레 사인해주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이정후는 그 부부가 ‘태교 여행’을 왔다는 설명을 듣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가 주말마다 ‘정후 크루존’에서 나눠주는 티셔츠에 직접 사인해서 선물로 건네기도 했다.
이정후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들을 떠올리곤 “진짜 내가 뭐라고 태교 여행으로 여기까지 오시다니 정말 감사했다. 건강하고 튼튼한 아기를 낳으시길 바란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이날 경기 도중 이정후의 키움 히어로즈 시절 응원가를 틀며 이정후를 응원했다. 키움 응원가가 오라클파크에 울려 퍼지는 상황이 신기할 따름이다.
#자이언츠 전담 기자들이 보는 ‘이정후 열풍’
산호세 머큐리 뉴스의 저스티스 델로스 산토스 기자는 오라클파크에 울려 퍼지는 “정후 리” 챈트(응원구호)를 예로 들며 “홈 개막전을 보면서 이곳 팬들이 완전히 이정후를 받아들였고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지금까지 취재한 경험으로 이렇게 빠르게 한 선수의 팬층이 형성되는 건 거의 못 봤던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산토스 기자는 자이언츠 팬들이 이정후를 좋아하는 배경을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자이언츠는 몇 년 전부터 매일매일 경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스타플레이어가 없었다. 로건 웹도 인기가 많지만 그는 5일에 한 번 등판하는 투수다. 팬들은 매일 볼 수 있는 슈퍼스타에 목말라 했는데 이정후가 그 대상이 됐다. 이정후가 지난해엔 부상으로 37경기밖에 뛰지 못했는데 지금은 외야를 누비고 도루도 많이 하고 홈런성 타구도 보여주는 등 팬들이 좋아할 만한 플레이를 하고 있다.”
산토스 기자는 아직 시즌 초반이긴 해도 이정후라면 충분히 올스타전에 선발될 수 있는 자질과 실력과 인기를 갖추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외야수 경쟁이 치열하지만 타구 속도와 콘택트 능력, 파워와 잠재력까지 감안한다면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설명했다.
MLB.com의 마리아 구아르다도 기자는 “이정후야말로 팀 내 가장 인기 있는 선수 중 한 명”이라면서 “팬들이 이정후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정말 멋진 일”이라고 말했다.
“최근 이정후에게 ‘Hoo Lee Gans’라는 팬 그룹이 생기지 않았나. 지난해에는 부상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지만 올해는 건강하게 복귀해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어 팬들이 응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자이언츠 팬들은 ‘우리 선수’라는 느낌을 갖는 선수에게 특히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 진짜 스타라고 할 만한 선수가 부족했는데 브랜든 크로포드, 파블로 산도발 이후 이정후가 등장했다. ‘정후 크루존’뿐만 아니라 이정후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드럼 비트에 맞춰 이름을 외치는 문화까지 생긴 걸 보면 팬들이 이정후에게 진심으로 몰입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구아르다도 기자는 샌프란시스코의 베이 에어리어에 한국계 커뮤니티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정후를 중심으로 그 문화와 팬덤이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게 인상 깊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다른 선수는 몰라도 이정후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실력이 출중하니까”라고 답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