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디바’→‘사패’ 성장과 변화의 최정점…“제작사분들이 이 역할 제가 맡아야 신선할 것 같다더라”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하이퍼나이프’에서 박은빈은 과거 촉망받는 천재 신경외과 의사였지만, 스승으로 모시던 사람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진 세옥을 연기했다. 뇌라는 인체 기관에 매혹돼 미친 듯이 탐닉하는 세옥은 그 분야 최고로 인정받는 신경외과 교수이자 또 다른 천재인 자신의 스승 덕희(설경구 분)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집착한다. 그러나 세옥에게서 끝없는 이기심과 살인 미수까지 할 정도의 비정상적인 집착을 읽어낸 덕희가 의사 면허를 박탈하자 그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며 증오하게 된다.
“세옥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순도 높은 애정과 이기심을 가지고 미친 듯이 몰두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일을 더 꼬이게 만들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고회로를 가진 인물이죠. 이제까지 ‘내 것’을 가져본 적 없기 때문에 원하는 걸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쳐요. 세옥에게 있어선 덕희 역시 ‘내 선생님’, ‘내 것’이죠. 자신을 버렸던 덕희가 정말 죽는다고 하니까 ‘어떻게 마음대로 죽을 수가 있어!’라는 마음으로 달려드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의사 면허가 박탈되고도 세옥은 불법 수술장의 신경외과 전문의로 일하며 수술을 향한 허기와 갈증을 채운다. 이 과정에서 불법 수술을 빌미 삼아 돈을 요구하던 간호사를 살해하고도 당연히 해야 할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옥에게 전형적인 사이코패스가 아닌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모습을 투영했다는 박은빈은 1화부터 등장한 이 충격적인 살인 신의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캐릭터를, 30년 가까운 배우 생활에 비춰 봐도 처음으로 연기하게 된 것인 만큼 ‘하이퍼나이프’는 그 박은빈조차도 ‘기를 쓰고’ 연기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지만 마냥 악인이라고 보기엔 어딘지 모르게 연민이 가는 세옥의 안에 켜켜이 쌓인 감정의 레이어를 하나씩 선명하게 펼쳐 보이는 것이 박은빈에게 있어 가장 큰 숙제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시청자들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동정은 받을 수 있길 원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인간 자체가 참 독선적이고, 양심도 결여돼 있고, 충동조절도 안 되고, 사람을 감정적으로 몰아붙이죠(웃음)! 이런 지점들은 캐릭터로서 과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저만의 방식으로 인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다행히 너무 정이 안 가는 캐릭터가 아니고 ‘나쁘긴 한데, 응원해도 될까?’라며 품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웃음). 그게 정말 감사했어요. 악행을 저지르는 캐릭터다 보니 차마 사랑받길 바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내적으로 어떤 성장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세심하게 신경 쓰려고 노력했죠.”
세옥의 과거가 풀리면서 덕희와의 애증적인 사제 관계 서사가 정점을 향해 치닫는 ‘하이퍼나이프’의 후반부는 특히 시청자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그를 증오하는 세옥에게 기어코 자신의 뇌수술을 맡기려는 덕희의 속내가 사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세옥에게 ‘실패의 기회’를 주려했기 때문이라는 반전이 드러난 바로 그 부분이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두 사람이지만, 실패를 겪지 않아 더 성장하지 못한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희생하려 하는 덕희를 향해 분노하고 저주하다가도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는 세옥의 모습은 ‘하이퍼나이프’를 본 시청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신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비뚤어진 사제관계’를 함께 만들어나간 선배 배우 설경구와의 호흡에도 기대 이상의 호평이 쏟아졌었다. 두 배우 모두 30년 동안 연기자 생활을 해 왔지만 ‘하이퍼나이프’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개 전부터 대중들의 관심을 받은 차였다. “선배님과 함께하는 모든 장면이 도파민이었다”며 웃어 보인 박은빈은 성공적으로 작품을 마치게 된 공을 모두 설경구에게 돌렸다.
“아무래도 작품 자체가 설경구 선배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게 했죠. 이 사제가 가진 관계성 자체가 범상치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은 것을 표방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기에 각자 역동하는 감정들도 그냥 상식적으로만 흐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 같은 경우 연기할 때만큼은 현장에서 직관적으로 부딪치며 얻는 것을 좋아하는데, 선배님과도 역시 리허설 때보다 실제 슛 들어갔을 때 전력으로 맞부딪치는 그 호흡이 너무 잘 맞더라고요. 이렇게 알뜰하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작품을 잘 마친 것 같아서 선배님께 너무 감사해요(웃음).”
앞서 박은빈은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로 전 국민을 강타한 ‘우영우 신드롬’을 만들어낸 뒤, 곧바로 tvN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2023)로 가수에 도전하며 이듬해 1월 그의 이름을 건 첫 팬 콘서트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매번 변신을 거듭하면서 이 직후 선보인 작품도 또 예상 밖의 새로운 얼굴인 ‘하이퍼나이프’였다는 점에서 배우 박은빈은 정말 ‘사람들을 심심하게 만들지 않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도전과제가 주어질 때마다 상상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는 그에게 있어 ‘변화와 성장’이란 단어는 어떤 의미로 자리 잡고 있을까.
“갑자기 급격하게 실력이 늘 때도 있지만 그게 언제나 상향곡선을 그리진 않아요. 뚜벅뚜벅 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볼 때 ‘이게 계단이었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그런 느낌의 성장이지 않을까 싶죠. 일주일을 내내 쏟아부어도 안 되다가 마지막 순간에 깨달음을 얻으면서 저력을 발휘할 때가 있었거든요. 지금 당장의 진전은 없더라도 결국은 다 비축을 해둬야 제 것이 되는 거니까 언젠가 그게 발휘되는 순간만을 기다리게 되는 것 같아요. 때론 지치더라도 나중에 분명히 성취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기르면서, 그런 식으로 저와 투쟁하며 살고 있어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