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시즌서 17년 만에 공식 대회 우승…소속팀·국대서 모두 안 풀렸던 손흥민 이번만큼은 ‘기쁨의 눈물’

#한국팬들의 트라우마
킥오프를 약 한 시간 앞뒀던 22일 새벽, 손흥민과 토트넘의 결승전을 생방송으로 보기 위해 밤잠을 설치던 국내 축구팬들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경기에 앞서 발표된 선발 라인업에서 손흥민이 빠진 탓이다. 손흥민은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고 그의 자리인 왼쪽 측면에는 히샬리송(브라질)이 출전했다.
2008년 5월 러시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그 경기'를 떠올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박지성이 출전 명단에서 제외돼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던 경기다. 앞서 8강과 4강 4경기에서 모두 풀타임을 소화했기에 벤치에도 앉지 못한 충격은 적지 않았다. 손흥민의 선발 출전 불발을 지켜본 팬들은 '박지성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앞서 손흥민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해 있던 기간이 있었다. 지난 4월 발 부상 후 회복이 더뎠고 지난 5월 11일이 돼서야 실전 복귀했다. 당시 후반 교체 출전으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이번 결승전 이전까지 선발 출전은 단 1회에 불과했다. 중요 경기에 선발로 그를 내보내기는 몸 상태나 경기 감각이 우려됐다.
손흥민의 선발 제외는 전술적 선택으로도 해석됐다. 단 한 경기로 트로피 향방, 챔피언스리그 진출 등 많은 것이 가려지는 결승전이었다. 실점을 억제하는 안정적 운영을 위해 활동량과 파워로 수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원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또 엔지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감독은 제임스 매디슨(잉글랜드), 데얀 클루셉스키(스웨덴) 등이 부상으로 이탈하자 공격적 역할에 치우친 미드필더 기용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손흥민의 선발 불발이 17년 전 박지성 트라우마와 차이점은 있었다. 손흥민은 벤치에 앉아 교체 출전이 가능했다. 토트넘의 선수단 두께가 두껍지 않기에 출전 가능성은 충분했다. 실제 손흥민은 경기에서 첫 번째 교체 카드로 활용됐다.

포스테코글루 감독 부임(2023년 여름) 이후 토트넘은 공격적인 팀으로 거듭났다. 공격 진영에 많은 숫자를 두고 적극적으로 수비 라인을 끌어올렸다. 실점에도 굴하지 않고 과감하게 공격에 나서는 태도는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번 시즌에도 공격 기조는 이어졌다. 프리미어리그에서 37경기를 치른 현재 63골을 넣어 득점 부문 공동 6위를 기록 중이다. 그러나 수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63골을 넣고도 61골을 실점해 이번 시즌 강등권을 간신히 면한 17위에 올라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수비진의 면면이 화려하다는 것이다. 우측 중앙수비를 맡는 크리스티안 로메로(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다. 파트너 미키 판 더 펜(네덜란드)은 신장 193cm의 피지컬과 세계 최고 수준의 속도로 호평받는 자원이다. 이들은 레알 마드리드 등 '메가 클럽'과 이적설이 나오는 등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굴리엘모 비카리오 골키퍼 역시 토트넘 입단 당시 이적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선수다.
그럼에도 토트넘의 수비는 약점으로 지적받는다. 다수 선수를 적극 공격에 가담케 하고 수비진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포스테코글루 감독 특유의 전술 탓이다. 수비진에서 부상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로도 지목된다.
이번 맨유와 결승전에서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맨유가 긴 시간 동안 공을 점유했기에 위협적인 크로스나 슈팅장면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골문 앞에서 토트넘 수비진의 결정적인 방어로 실점을 막아냈다. 후반 23분 빈 골문에 들어가는 공을 발리킥으로 걷어낸 판 더 펜의 수비 장면은 백미였다.
손흥민의 자리에 선발로 나선 히샬리송도 기대 이상의 수비 능력을 선보였다. 그를 마주한 맨유의 오른쪽 측면 자원들은 한때 활기를 띠는 듯했으나 결정적인 장면에서 히샬리송에 막혔다. 그는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듯 후반 22분 그라운드에 드러누우며 교체를 요청했다.
히샬리송 대신 투입된 손흥민의 1차 과제 역시 수비였다. 토트넘 진영의 페널티박스 근처에 자리를 잡고 방어에 집중했다. 토트넘은 끈질긴 수비 집중력으로 선제골을 지키며 우승을 이뤄냈다.

손흥민과 토트넘의 우승에 국내와 현지 토트넘팬 이외에도 손흥민의 전 소속팀, 전 동료들이 기쁨을 나눴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함부르크, 레버쿠젠도 손흥민에게 축하를 보냈다. 과거 토트넘의 챔피언스리그 결승행에 기여했던 루카스 모우라는 현재 브라질에서 활약하고 있음에도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손흥민과 토트넘 구단이 그간 유독 우승에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손흥민의 입단 당시 토트넘은 강팀으로 성장해가던 시기였다. 손흥민 입단에 1년 앞서 팀 지휘봉을 잡은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아르헨티나) 감독은 리빌딩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구단 유스 출신 해리 케인(잉글랜드)은 리그 정상급 공격수로 성장했다. 유망주 영입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지던 신입생 델레 알리(잉글랜드)는 곧장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입단 1년 차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손흥민은 2년 차부터 두 자릿수 골을 넣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불리던 크리스티안 에릭센(덴마크)의 활약까지 더해 토트넘의 고공행진은 지속됐다. 이들은 이름의 이니셜을 따 'DESK 라인'으로도 불렸다. 손흥민의 입단 이후 4년간 토트넘의 리그 성적은 3위-2위-3위-4위였다. 때론 우승 경쟁을 펼쳤고 안정적으로 상위권에 안착했다.
절정은 2018-2019시즌이었다. 토트넘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도르트문트(독일), 맨체스터 시티(잉글랜드), 아약스(네덜란드) 등 강호를 차례로 누르고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에서는 리버풀(잉글랜드)을 만나 패했으나 구단 역사상 대회 최고 성적을 남긴 이들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아쉬운 점은 트로피와 인연이 없었다는 것이다.
포체티노 감독과 결별 후 구단은 지속적으로 우승을 노렸다. 조세 무리뉴(포르투갈), 안토니오 콘테(이탈리아) 등 명장들을 잇달아 선임하며 우승 열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토트넘은 우승 트로피와 인연이 없었다. 리그컵 결승전에 한 차례 올랐으나 이마저도 준우승(2021년)으로 마무리했다.
이후 '토트넘 황금기'를 만들었던 선수들은 하나둘 팀을 떠나갔다. 팀을 이끌 능력이 있는 선수들은 우승 기회를 찾아 이적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노쇠화를 피하지 못한 선수들은 쫓겨나듯 새 팀을 찾아야 했다.
전력이 약해져가던 토트넘 구단은 큰 결심을 했다. 팀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해리 케인을 바이에른 뮌헨(독일)에 판매한 것이다. 전력 재정비 선언과 다름없었다. 손흥민도 오랜 기간 함께한 자신의 파트너를 잃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 체제에서 이뤄진 영입은 20대 초중반의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팀은 현재보다 미래를 바라보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손흥민의 우승 꿈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2024-2025시즌은 손흥민과 토트넘에 최악의 시즌이다. 리그 순위는 강등권 근처까지 떨어졌다. 희망을 봤던 리그컵 우승 도전은 4강에서 마무리됐다. 손흥민도 지난 8시즌 동안 이어 온 두 자릿수 득점을 달성하기 어려워지는 등 개인 기록마저 저조했다. 입단 1년 차 리그 4골을 기록한 이후 토트넘에서 최악의 개인 성적이다.
하지만 유로파 우승으로 모든 걸 이뤄냈다. 토트넘 황금기에도 이루지 못한 우승이었다. 동료들이 팀을 떠났지만 손흥민은 주장으로 남아 우승을 일궈냈다. 6년 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한 선수 중 이번 유로파리그 결승에 토트넘 선수로 출전해 우승한 이는 손흥민이 유일했다.
그는 우승 직후 국내 중계사와 인터뷰에서 "항상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누구도 하지 못하는 길을 찾아 나서는 게 저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에서 부진, 대회 탈락 등으로 여러 차례 눈물을 보였던 그는 이번에는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며 울었다.
이번 우승으로 손흥민은 이적 등 변수가 없다면 챔피언스리그에 복귀한다. 유로파리그 우승 팀에는 챔피언스리그 참가 티켓을 준다. 손흥민은 팀 성적이 하락하며 2023년 3월 이후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다. 다시 서게 될 큰 무대에서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관심이 집중된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