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떨어지니 ‘해바라기’도 시드나
▲ 어윤대 회장. 박은숙 기자 |
“한조직의 수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일이 임직원들이나 관계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한다면 물러나란 소리나 마찬가지다. 오너가 없는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 1년 넘게 추진해오던 ING생명 인수가 이사회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데 대해 어느 ‘주인 없는 회사’ 고위 관계자가 내뱉은 말이다. 지난 18일 열린 KB금융 이사회에서 ING생명 인수안에 대한 표결 결과 찬성 5표, 반대 5표, 기권 2표로 부결됐다.
KB금융 이사회는 상임이사 2명(어윤대 회장, 임영록 KB금융지주 사장)과 비상임이사 2명(민병덕 국민은행장, 본 리히터 ING은행 아시아지부장), 사외이사 9명, 모두 13명으로 구성돼 있다. ING생명 인수안에 대한 표결은 직접적인 ‘관계인’ 리히터 지부장을 제외한 12명이 참여, 7명 이상 찬성해야 가결된다. 어 회장과 임 사장, 민 행장이 찬성표를 던졌다고 보면 사외이사 9명 중 2명만 찬성한 셈이다.
KB금융은 부결 이유에 대해 “인수·합병(M&A)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했지만 내년 경제 여건이 불투명하고 금융환경이 날로 어려워지는 것을 감안하면 업계 최고 수준의 자본적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보다는 어윤대 회장의 힘이 약화되고 레임덕이 본격화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비록 어 회장의 임기는 내년 7월까지지만 어 회장의 ‘말발’이 벌써 통하지 않는다는 것. 금융권 한 관계자는 “권력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곳 중 하나가 금융권”이라며 “정권 말에 금융권에서 굵직한 일이 성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귀띔했다. 더욱이 어 회장은 금융권에서 대표적인 ‘MB맨’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ING생명 인수는 어윤대 회장의 숙원이었다. 은행 비중이 90%에 달하는 구조에서 탈피, 비은행부문을 강화하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야만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 어 회장의 생각이었다. 취임 초부터 적극적인 M&A를 예고한 어 회장이 큰 관심을 보인 곳 중 하나가 ING생명이다.
어 회장이 ING생명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 KB금융 회장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 때부터. 이날 어 회장은 “ING에 생명보험사를 팔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밝혔다. 이후 올 2월 ING그룹이 아시아·태평양 법인 등을 매각할 것을 발표하면서 어 회장은 그토록 바라던 ING생명 인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어윤대 회장 취임 당시 전국금융산업 노조원들이 거부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일요신문 DB |
대한생명, AIA 등이 ING생명에 눈독을 들이긴 했으나 지난 7월 있은 본입찰에 KB금융만 단독으로 참여했고 9월에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사실상 KB금융이 인수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하지만 KB금융 노조와 사외이사들의 반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어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당초 2조 7000억 원가량으로 알려져 있던 인수 가격을 2조 2000억 원으로 낮춘 성과도 보여주었고 노조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외이사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른바 ‘베이징 술자리 소동’이라는 불미스러운 일도 벌어졌다. 어 회장은 지난 11월 20일 중국 베이징에서 사외이사들과 경영진이 함께한 회식자리에서 ING생명 인수를 반대하는 사외이사들을 비난하며 소리를 지르고 술잔을 깨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부상자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이 금융감독원의 심기를 건드렸다. 금감원은 베이징 술자리 소동과 관련해 관련자들에게 경위서를 요구했다. 또 KB금융의 ING생명 인수마저 떨떠름해 한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이 같은 상황은 어 회장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계 관계자는 “정권 초나 중반만 해도 예상하기 힘든 그림”이라며 “현 정권 실세들의 입지가 그만큼 줄어든 셈”이라고 진단했다. 어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동문으로 한국금융학회장, 한국경영학회장, 고려대 총장 등을 거쳤다. 은행장 등을 거친 경험이 없이 주로 학자나 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실질적으로 KB금융 회장이 금융 경영의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 회장이 KB금융 회장으로 결정됐을 때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이 거셌던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성과에 대한 어 회장의 조급증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비은행부문 강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목표 아래 분주히 움직였지만 사실상 성과는 전무하다. 반대 여론이 거센 탓에 우리금융 인수에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으며 단독입찰에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ING생명 인수마저 물거품이 되면서 어 회장이 목표했던 바는 현재까지 거의 이루지 못한 상태다.
어 회장 취임 이후 올해 초 제일저축은행(현 KB저축은행)을 인수했지만 이는 금융당국이 떠안긴 것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 회장이 그렸던 큰 그림에서 제대로 완성된 것이 없는 셈이다. 어 회장은 정권이 끝나기 전에 ING생명을 인수해 성과도 내고 체면치레도 하는 효과를 보려 했지만 사외이사들이 완강히 반대하자 조급함과 분을 이기지 못했고 이것이 표출된 사건이 베이징 술자리 소동이다.
ING생명 인수 무산으로 어윤대 회장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질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남은 임기 동안 어 회장이 할 수 있는 일과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도 걸림돌이다. 벌써부터 현 정권이 끝나면 어 회장의 자리도 불안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어 회장의 연말연초 행보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