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복지’…아버지 때완 다르다
▲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서강학파는 남덕우 전 총리를 비롯해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배우고 돌아와 서강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들이 박정희 정부에서 연이어 경제 수장을 맡으면서 형성됐다. 국민대 정치학과 출신인 남덕우 전 총리는 서울대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다 1964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교수 재직 중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1년간 수학 후 1969년 귀국, 곧바로 재무장관에 임명된다.
남 전 총리가 자신이 재무장관이 된 사실을 이승윤 전 부총리(당시 서강대 교수)와 함께 청와대로 가던 택시 안에서 라디오로 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만큼 전격적이었다. 남덕우 전 총리의 재무장관 입각은 서강학파의 출발점이자 서강학파와 박정희-박근혜 부녀간 인연의 시작점이었다.
남덕우 전 총리는 이후 최장수 재무장관(4년 11개월)과 최장수 부총리(4년 3개월)의 기록을 세울 정도로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했다. 남덕우 전 총리를 채근해 청와대로 데려간 이승윤 전 부총리 역시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를 거쳐 서강대 교수를 지낸 서강학파 1세대다. 남덕우 전 총리, 이승윤 전 부총리와 함께 서강학파 1세대 트로이카로 불리는 김만제 전 부총리도 미국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서강대 교수를 지내다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를 지냈다. 이들은 선 성장·후 분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정부 주도·수출 중심 경제 성장 등을 입안해 압축 성장을 이뤄냈다.
서강학파는 전두환-노태우 정부까지 우리나라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용한 신병현 전 부총리와 김재인 전 경제수석,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신임한 이승윤 전 부총리와 김종인 당시 경제수석 등이 서강학파 2세대로 전두환-노태우 시절 성장 우선 정책을 이어갔다.
당시 서강학파가 국가 경제를 주름잡았던 것은 서강대 경제학과가 미국에서 수학한 경제인재 풀을 대거 교수로 채용한 덕분이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서강대 교수로 재임하던 1965년 당시 국내 대학 경제학과 중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는 서강대에 남덕우 전 국무총리 등 3명, 연세대 2명, 모두 5명에 불과했다. 1971년에는 총 10명의 미국 박사학위 경제학 교수 중 서강대에 절반인 5명이 몰려있었다(나머지는 연세대 3명, 서울대 2명이었다).
하지만 서강학파의 경제정책에 대한 영향력은 압축성장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사그라졌다. 성장보다는 분배를 중시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서강학파와 각을 세워왔던 ‘학현학파’ 인물들이 대거 정부로 진출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학현학파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다. 경북대 교수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 1분과위원회 간사,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지내며 노무현 정부의 경제 정책을 만들었던 이정우 교수(문재인 민주통합당 선거대책위 경제민주화위원장)가 당시 학현학파의 핵심이었다. 이정우 교수는 소득분배론에 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정통한 학자로 분류된다. 서울시립대 교수로 일하다 노무현 정부 때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임명됐던 강철규 우석대 총장, 노동부 장관을 지낸 김대환 인하대 교수도 대표적인 학현학파 인사들이다.
학현학파가 주류를 이루던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홈페이지에 서강학파의 종언을 선언하는 글을 띄우면서 시선을 끌었다.
이번 대선도 오랜 시절 이어진 서강학파와 학현학파 대결의 연장선상이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경제정책을 서강학파와 학현학파 핵심인물들이 주도한 탓이다.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며 동반성장과 복지 분야를 선점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경제정책은 서강학파 2세대로 분류되는 김종인 위원장이 만들어냈다. 서강학파 3세대인 김광두 원장이 세운 국가미래연구원에는 서강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김인기 중앙대 명예교수와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 등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거시 금융 스터디를 함께하는 사이다.
이에 반해 문재인 후보의 경제정책의 큰 그림은 이정우 위원장이 맡아 그렸다. 재벌 개혁과 복지 확대, 반값 등록금 등 굵직굵직한 경제정책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강철규 우석대 총장은 지난 총선 당시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재벌의 횡포를 막을 사람을 공천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여전히 학현학파가 민주당 경제 정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 경제부처 관계자는 “이번 대선을 통해 서강학파가 15년 만에 부활하고 있지만 현재 서강학파가 내놓은 경제정책이 과거 서강학파가 추진했던 정책 철학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 과거에 서강학파는 선택과 집중으로 대변되는 압축, 고도성장을 중시했다면 이번 대선에서는 이에 못지 않게 동반성장과 복지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면서 “물론 분배보다 성장을 중요시하는 큰 흐름은 변함이 없지만 시대 흐름에 맞춰 무게 중심을 이동시킨 것으로 보인다. 향후 경제 정책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지켜볼 일”이라고 말했다.
이준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