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계양산 골프장)’은 녹슬고 ‘꿈(제2롯데월드)’은 깨지고…
▲ 신격호 롯데 회장이 14년간 공들여온 555m의 제2롯데월드가 고도제한에 막혀 무산됐다. | ||
이렇다할 악재없이 지난 몇 년간 중화학 분야 진출확대와 홈쇼핑 분야 신규진출 등 거침없이 사업확장을 계속하던 롯데왕국에 브레이크가 연속적으로 걸리고 있다. 가랑비에 옷젖듯이 조금씩 터져나오던 악재들이 최근에는 재계 서열 5위 롯데그룹을 총체적 난국으로 밀어넣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나 신격호 회장의 오랜 숙원사업들이 난관에 부딪히고 있는데 그 배경에 정부부처와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롯데의 몇몇 계열사는 아예 정부부처의 강도 높은 조사까지 받고 있다. 과거 특혜시비에 곧잘 휘말리곤 했던 롯데의 전력을 보노라면 격세지감이 절로 느껴진다.
최근 롯데를 가장 아프게 한 일은 아마도 제2롯데월드 건립 무산일 것이다. 신격호 롯데 회장이 지난 14년간 잠실 부지를 놀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555m 짜리(112층) 잠실 제2롯데월드 건립은 결국 정부의 불허로 무산됐다. 지난 7월 26일 총리실 주관 행정협의조정위원회에서 ‘555m 높이는 허가할 수 없고 대신 203m 이하로 지으라’고 결론이 나면서 신 회장의 ‘세계 최고층 롯데월드’ 꿈은 다시금 멀어졌다.
제2롯데월드 사업이 지난 14년간 제자리에서 맴돈 가장 큰 이유는 국방부의 반대에 있었다. 인근 성남에 위치한 공항 때문에 고도제한이 불가피하다는 까닭에서였다. 이 과정에서 ‘롯데와 국방부가 서울공항 활주로 변경 비용 분담을 통한 제2롯데월드 건립 승인 모색 중’이란 미확인 소문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제2롯데월드 연내 착공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제2롯데월드만큼이나 신 회장의 속을 태워온 인천 계양산 골프장 건설도 난항 중이다. 롯데는 지난 2003년부터 인천 계양산 북쪽 자락 일대에 골프장 건설을 추진해왔지만 이 지역 시민환경단체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롯데 측이 사업허가를 받기 위해 계양산 일대 멸종위기 야생 동물 수치를 조작했다는 논란이 시민단체 등을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인근 중학교 학생 20여 명이 ‘골프장 건설 지지’ 등이 쓰여 있는 현수막을 들고 나타나자 롯데와 해당관청 간의 물밑교감설이 거론되기도 했다.
시민단체의 반대가 계속되자 롯데건설은 골프장 규모를 당초 27홀에서 18홀로 축소하고 골프장 주변 산림 보전 등을 약속하면서 민심 얻기에 나섰다. 그러나 계양산 골프장 건설 사업은 제2롯데월드와 마찬가지로 올해 첫 삽을 뜨는 것조차 어려울 전망이다. 현재 진행 중인 인천 도시계획위원회의 사업 승인 심사는 8월 중순께나 결정날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청의 허가가 떨어져도 건교부 장관의 최종승인을 거쳐야 하는데 인천시청 관계자는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라 밝힌다. 결국 정부부처인 건교부가 적극 협조(?)를 해야 연내 착공이 가능한 셈이다. 일각에선 롯데가 제2롯데월드 건으로 정부기관과 신경전을 겪은 점이 건교부 승인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도 관심을 보인다.
정부부처와의 갈등으로도 모자라 롯데는 사업영역 확대를 위한 집안싸움까지 치러야 할 참이다. 롯데는 지난 5월 일본 여행업계 최대기업인 JTB와 50 대 50 합작법인 롯데JTB를 설립해 국내 여행업에 뛰어들었다. 롯데는 국내 여행업계 경쟁상대가 된 롯데관광개발을 상대로 로마자 ‘L’ 3개가 겹쳐진 롯데 마크를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소송을 냈다. 이에 롯데관광개발은 지난 30년간 사용해온 로고를 버릴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김기병 회장의 롯데관광개발은 지분구조상 롯데그룹과 별개의 기업이지만 김 회장이 신격호 회장의 매제로 범 롯데가에 속한다.
▲ 신규사업들이 잇따라 난관에 부딪힌 롯데는 대한통운 인수전에 참여해 분위기 반전을 꾀한다는 소문이다. | ||
이런 신규 사업 추진이 난관을 겪고 있는 와중에 주력사인 롯데쇼핑이 최근 한결 위상이 높아진 공정거래위원회의 ‘화력시범’ 1호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어 롯데 측을 난감하게 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6월 말부터 롯데시네마가 극장 내 매점사업을 시네마통상과 유원실업에 위탁하면서 물량 몰아주기를 했는지에 대한 현장조사를 벌였다. 공정위는 최근 정유업계와 건설업계 담합 건 등을 파헤쳐 유수의 재벌 계열사들에 수백억 원대 과징금을 부과하는 한편 시장감시기능을 한층 확대하는 조직개편을 하는 등 어느 때보다 강한 칼날을 휘두르고 있어 롯데가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에 업계의 관심이 쏠린다.
게다가 이 사안은 <일요신문> 등의 언론보도→시민단체의 문제제기→공정위 조사의 수순을 밟고 있어 자칫하다가는 검찰 조사로 이어질 가능성마저도 없지 않다. 이 사안의 예민성은 신격호 회장의 딸의 친모가 사실상 오너로 있는 회사가 관련됐다는 점에서 공정위의 판결이 주목받고 있다. 이 사안이 여타 재벌가 오너의 회사익 편취사례와는 좀 다른 경우에 해당되기도 하거니와 신 회장 2세 그룹의 재산분할 문제로 비화될 소지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롯데시네마의 부당내부거래 의혹 조사를 시작한 무렵인 지난 6월 말 관세청은 롯데쇼핑의 수입품 관세 누락 의혹 관련 조사를 시작했다. 관세청은 롯데의 외국환거래 규모에 비해 납부된 관세가 너무 적다는 시각을 전제로 조사에 착수했으며 수입품 관세에 대한 고의적 탈루 여부에 조사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롯데가 마음먹고 추진한 대형 사업이 난항에 부딪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부처의 강도 높은 조사까지 받게 되다보니 그룹 안팎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룹이 위기설에 휩싸이다보니 신격호 회장이 어떤 타개책을 내놓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업계 인사들은 롯데가 돈 잔치를 통해 분위기 반전을 시도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롯데쇼핑 상장으로 마련된 현금(수조 원으로 추정)을 풀어 대형 M&A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다. 업계 인사들은 롯데가 눈독들일 만한 매물로 올 하반기 매각설이 나도는 대한통운을 거론한다. 한때 이 같은 소문이 나돌자 신동빈 롯데 부회장이 직접 나서 대한통운 M&A 가능성을 일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롯데백화점 등 유통사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롯데그룹이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을 인수하면서 업계 인사들 사이에선 물류 택배 사업에 직접 뛰어들 가능성이 계속해서 거론돼 왔다. 대한통운 매각가격이 1조 5000억 원대로 추정되고 있어 롯데쇼핑 상장 차익을 밑천 삼아 덤벼들면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란 평이다. 일각에선 롯데가 지방의 한 중견 택배업체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이야기도 흘러 다닌다.
현재 대한통운 인수전엔 금호아시아나 SK 한진 등 만만치 않은 재벌들이 관심을 갖는 것으로 알려진다. 롯데가 대한통운 M&A에 뛰어들 경우 이들 재벌들과의 경쟁에서 이길지는 미지수다. 롯데가 최근 몇 년간 진로 해태제과 까르푸 등 대형 매물 인수전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신 까닭에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