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신진서 ‘맏형’ 원성진 만리장성 허점 노려…수적 우위 중국 ‘죽음의 집안싸움’ 출혈 불가피
반면 주최국 중국은 14명이 16강에 오르며 수적 우위를 앞세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바둑판의 형세가 그렇듯, 숫자 뒤에 숨은 행간을 읽어야 비로소 국면의 본질이 보인다. 이번 란커배의 초반 판세는 한국에 ‘위기 속 기회’를, 중국에는 ‘다수 속 고민’을 안겨준 묘한 형국으로 흐르고 있다.

물론 한국 팬들의 실망감은 크다. 랭킹 3위 강동윤 9단이 딩하오 9단에게 361수 혈투 끝에 통한의 반집패를 당했고, 허리를 든든히 받쳐줘야 할 변상일, 신민준, 안성준 9단 등 강자들이 줄줄이 역전패로 고배를 마셨다. 중국과의 상대 전적에서 밀린 것은 분명 냉정한 현실이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 한 명에게 모든 영광이 주어지는 ‘위너 테이크 올’ 구조의 현대 세계대회에서, 절대강자 신진서의 존재는 수적 열세를 상쇄하고도 남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살아남은 두 기사의 대진운도 절묘하게 풀렸다. 디펜딩 챔피언 신진서 9단은 중국의 중견 랴오위안허 9단과 만난다. 상대 전적 4승 1패의 압도적 우위는 심리적 안정감을 더한다. ‘란커배는 자기와 잘 맞는 대회’라 공언했던 신진서에게 2연패로 가는 첫 관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대진이다.

이어 16강에서 만날 상대는 송지훈 9단을 꺾고 올라온 중국의 신예 왕스이 8단. 객관적 전력과 경험 모든 면에서 원성진의 우세가 점쳐지는 만큼, 8강 동반 진출이라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기대하게 만든다. 두 개의 확실한 창이 만리장성의 허점을 노리는 형국이다.
#14명의 만리장성, 그러나 시작된 ‘집안싸움’
반면 16강 중 14석을 휩쓴 중국의 속내는 복잡하다. 잔칫집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출혈이 상당하고 앞으로의 손실은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32강전부터 상처가 깊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현 중국 랭킹 1위 왕싱하오 9단이 자국의 복병 천셴 8단에게 덜미를 잡히며 일찌감치 짐을 쌌다. 원성진에게 패한 투샤오위 9단의 탈락 역시 중국으로선 뼈아픈 대목이다.
문제는 16강부터 본격화될 ‘제살 깎아먹기’ 식 혈전이다. 대진표를 보면 중국의 고민이 역력하다. 랭킹 3위 리웨이칭과 4위 딩하오가 만나 둘 중 하나는 무조건 탈락한다. 우승 후보로 꼽히는 당이페이-리쉬안하오, 세계대회 우승자 출신인 미위팅-쉬자양의 대결 역시 어느 한쪽의 조기 탈락을 예고하고 있다.

#‘제2의 김은지’ 탕자원 돌풍
이번 대회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단연 탕자원 6단의 돌풍이다. 통합예선부터 한국의 정유진 4단, 김채영 5단 등 강자들을 연파하고 본선에 올라, 본선 48강에서 션페이란 8단, 32강에선 일본의 오다케 류 7단을 격파하며 16강에 진출한 유일한 여자기사가 됐다.

탕자원의 등장은 한국 바둑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김은지 9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남성 기사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최상위권 경쟁에 과감히 뛰어들어 판도를 흔드는 젊은 신예의 출현은 한중 양국 바둑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록 16강에서 ‘속기의 귀재’라 불리는 리친청 9단을 만나 험난한 길이 예상되지만, 그녀가 던진 파장은 이미 란커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오는 10월 8일 중국 취저우에서 속개되는 란커배 16강전은 ‘선택과 집중’의 한국과 ‘수적 우세’로 무장한 중국이 우승컵을 향한 외나무다리에서 재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16강전에 이어 9일 8강전, 11일 4강전, 12~15일에 결승3번기가 예정돼 있다.
제3회 취저우 란커배의 제한시간은 각자 2시간, 초읽기는 1분 5회가 주어진다. 우승상금은 180만 위안(약 3억 4000만 원), 준우승 60만 위안, 4강 20만 위안, 8강 10만 위안, 16강 5만 위안, 32강 3만 위안, 48강 2만 위안이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