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 재임기간에 두 아들이 구속되었다. 이신범 전 의원의 폭로가 발단이 된 막내아들 홍걸씨의 구속(오른쪽). | ||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여권의 ‘가시 뽑기’ 작전은 본격화됐다. 그 첫 타깃은 정 의원이었다. 2000년 2월11일 밤 서울지검 공안 1부 수사관 4명은 서초구의 정 의원 집에 들이닥쳤다. 정 의원이 귀가하자마자 들어온 수사관들은 정 의원에게 체포영장이 아닌 ‘긴급체포서’를 제시하며 임의동행을 요구했다. 당시 정 의원은 DJ의 북한 공작금 1만달러 수수의혹 등 4건의 폭로사건으로 고소·고발된 상태였다.
정 의원은 잠깐 기다려달라고 요청한 뒤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후 평소 허물없이 지내던 한 언론사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잠복근무하던 수사관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정 의원은 다급한 목소리로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그 기자는 “절대로 나가지 말라. 일단 끌려가면 구속될 거다. 현역의원들과 기자들을 불러라. 언론이 모이면 함부로 하지 못할 거다”라고 ‘행동지침’을 줬다고 한다.
정 의원은 즉각 휴대폰을 두드렸다. 정 의원과 수사관들이 실랑이를 하는 동안 한나라당 하순봉, 이신범, 김영선 의원 등과 함께 언론사 기자들이 달려왔다. 그 순간 게임은 끝났다. 검찰의 체포작전은 불가능해졌다. 방송카메라가 움직이고 신문기자들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저항하는 정 의원을 물리적 힘으로 체포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날 정 의원이 체포됐다면 정국지형은 달라졌을 것이다.
체포작전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여권은 정 의원을 16대 총선에서 낙마시키는 방안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주당 핵심관계자는 “정형근의 아들 병역비리에 관련된 혐의를 잡고 있다. 아들이 보충역으로 되는 과정에서 병역비리가 있다. 공개되면 한방에 간다. 터무니없는 폭로로 정권을 뒤흔드는 작태를 우리가 그냥 놔둘 줄 아느냐”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실제로 DJ정권은 99년 상반기에 박노항 원사의 병역비리사건 수사를 본격화하면서 정 의원과 박 원사 간의 커넥션을 집중 추적했다. 단순히 정 의원의 아들 병역문제뿐만 아니라 박 원사와 정 의원 간의 거래에 대해서도 주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 의원은 끝까지 살아 남았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정 의원을 보호해줬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한 중진의원은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이 총재와 정 의원 사이를 이렇게 규정한 적이 있다. “두 사람 사이는 신뢰관계는 아니다. ‘필요적 관계’라고 보는 게 적당하다. 이 총재는 정 의원의 정보력이 필요했다. 정 의원은 이 총재가 대통령이 되면 국정원장이 되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일각에서는 집권하면 정 의원이 국정원장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이 총재는 무서운 사람이다. 정권을 잡으면 골치 아픈 정 의원을 중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정 의원의 정보력은 역설적으로 DJ정권의 안기부 숙청작업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종찬 원장 시절인 98년 4월1일 국정원은 구 정권과 정치적으로 연결됐다고 판단되는 5백여 명의 직원에 대해 대기발령을 냈다. 시한은 99년 3월31일까지 1년. 중간에 명예퇴직할 경우 5천만원 정도의 명퇴수당을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대기발령자 중 2, 3급 직원 21명은 명퇴를 거부했다. 대신에 99년 4월15일 ‘국가를 사랑하는 모임’(일명 국사모)을 결성하고 직권면직 취소 행정소송을 냈다.
2000년 민주당 핵심관계자가 작성한 국사모 전모 문건에 따르면 회장은 전 안기부 의정부 출장소장이었던 서아무개씨였고, 대외총무는 전 제주지부장인 송아무개씨, 대내 총무는 정 아무개 전 대전부지부장이었다.
사무실은 서초동 S빌딩에 냈다. 직권 면직을 취소시키고 명예를 회복한다는 게 설립 당시의 목적이었다. 사무실 임대료 및 변호사 선임비용 등을 조달하기 위해 1인당 1천만원씩을 갹출했다. 그러나 소송이 뜻대로 되지 않자 DJ정권 공격쪽으로 활동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이들 중 강경파들은 송씨를 16대 총선에서 종로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시키기로 결정한다. 자신들의 목을 날린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낙선시키고 DJ정권의 비리를 공격함으로써 직권면직의 부당성을 알린다는 목표였다. 당시 국정원은 이 같은 기류를 사전에 감지, 설득작업에 나섰다.
송씨가 감찰실에 근무했을 때의 동료들을 보내서 “전직 직원이 개인적 한풀이 차원에서 총선출마를 할 경우 국정원이 또 다시 정치개입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참아달라”고 설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송씨 등이 총선 출마를 포기했지만 국정원 내의 인맥과 과거 자료 등을 활용해 안기부 1차장 출신의 정 의원의 폭로전에 관한 기초자료들을 제공했다는 게 DJ정권 핵심인사들의 주장이다.
2002년 대선전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시점에 들어갈 때쯤엔 정가 일각에서 일부 국사모 회원들의 ‘이권 개입설’까지 돌았다. ‘이회창 후보가 집권하면 정 의원이 국정원장이 되고, 그럴 경우 국사모 회원들이 복직해서 국정원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는 소문이 돌면서 업자들이 국사모 회원들에게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일부 회원들은 ‘입도선매’를 했다는 구설수까지 탔다.
물론 정 의원은 자신의 정보력과 국사모는 무관하다고 주장해왔다. 그 진위여부를 떠나서 정 의원은 이 총재에게 ‘소방수’였다. 특히 2002년 대선정국 와중에 여권이 이 총재를 겨냥한 ‘병풍’공세를 재개했을 때 한화갑 대표의 방북계획인 ‘도라산 프로젝트’, ‘국정원 도청 문건’ 등을 잇따라 폭로해 맞불을 놓았다. 그때마다 정국이슈는 이 총재 관련 의혹에서 DJ정권의 비리로 급격하게 옮겨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의원은 특유의 스타일로 인해 주변에 ‘동지’가 모이지는 않았다. 휴대전화만 해도 10여 개를 들고 다니면서 매월 2∼3개씩 번호를 바꿨다. 수행비서나 측근들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이 총재조차도 정 의원이 ‘잠적’해버리면 전화조차 할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변장용 콧수염과 안경, 모자까지 가방에 넣어서 승용차 트렁크에 넣어두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 ‘DJ저격수’ 이신범 전 의원(왼쪽)과 정형근 의원이 대화 를 나누고 있다. | ||
이 전 의원은 박정희 정권시절인 71년과 전두환 군사정권 때인 80년 두 차례나 DJ내란음모사건으로 수감됐던 경력을 갖고 있다. 더욱이 이희호 여사와는 일종의 사돈관계다. 이 전 의원의 남동생은 이 여사의 조카사위다. 때문에 이 전 의원이 정권 초부터 폭로전을 자청하고 나서자 동교동계 인사들은 사석에서 ‘인간이 안된 X’, ‘미친 X’ 등의 표현까지 써가며 비난했다.
그 ‘분노’는 2000년 2월10일 폭발했다. 이 전 의원은 이날 주요당직자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가 미국 태평양 연안의 팔로스버디스 지역에 호화주택을 갖고 있다”는 의혹을 폭로했다. 그런 까닭에 DJ가 4·13총선에서 이 전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필살의 카드’를 표적공천할 것을 지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민주당 한화갑 총무의 한 측근은 “이신범 의원의 지역구인 강서을은 장성민 청와대 상황실장 등이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이신범을 반드시 낙마시키라는 의지를 한 총무에게 전달했다. 순간 공천방향은 원점에서 재검토됐다”고 전했다. 그 필살카드로 낙점된 게 바로 민주당 김성호 의원이다.
김 의원을 천거한 사람은 한 일간지 기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총무와 친하게 지내던 그 기자는 “YS 차남인 김현철씨 계보인 이신범 의원을 이기려면 현철씨를 죽였던 카드를 쓰면 된다”고 조언했다는 후문이다.
김 의원은 97년 <한겨레> 기자로서 현철씨의 주치의였던 박경식씨를 집중취재해 현철씨의 국정개입 의혹을 특종보도 했던 인물. 그의 특종보도는 현철씨 관련 각종 의혹이 쏟아져 나오는 단초가 됐고 결국 현철씨는 구속된다. 김 의원은 부인까지 대동해 대전고 선배인 박씨의 집으로 찾아가 현철씨 관련 의혹을 취재할 정도로 집요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한 총무는 무릎을 치면서 그 기자의 아이디어를 채택했다고 한다. 결국 신문사에 사표를 쓰고 출마한 김 의원은 현역인 이신범 의원을 꺾고 화려하게 정계에 데뷔한다.
문제는 선거에 진 이 전 의원이 DJ의 표적공천에 한을 품고 더욱 집요하게 홍걸씨 비리를 캐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는 낙선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가 홍걸씨의 호화생활 의혹을 캐고 다녔다. 자신의 주장을 허위라고 보도한 LA한인방송과 소송을 벌였으나 패소했다.
이에 2001년 1월에 홍걸씨 부부를 상대로 60만달러의 증언거부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다. 4월에는 미 오렌지 카운티 법원에 홍걸씨의 ‘증언강제명령’을 청구하기도 했다. 홍걸씨는 그해 4월16일 증언대에 섰으나 주요 내용에 대해서는 증언을 거부함에 따라 이 전 의원과 티격태격하는 과정을 겪는다.
흥미로운 것은 홍걸씨측이 이 전 의원과 일체의 소송 등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66만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홍걸씨측은 실제로 2001년 5월17일 10만달러를 이 전 의원에게 줬다. 그러나 나머지 금액은 지불하지 않았다. 이 전 의원이 ‘홍걸이에게 10만달러를 받았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전 의원의 이 같은 주장은 미 현지언론과 국내 일부 주간지에 보도됐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전 의원의 주장이 국내언론들에게 ‘신뢰’받지 못했던 탓이다. 미국발로 들어온 이 전 의원의 ‘10만달러 수수’ 주장이 한나라당에 의해 공개됐지만 ‘또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웃어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한 중앙일간지가 2002년 4월 ‘10만달러 수수 의혹’을 대서특필하면서 핫 이슈로 부상했다. 당시 여권 핵심들을 궁지에 몰았던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인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부사장이 홍걸씨에게 9억원을 줬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학생 신분인 홍걸씨가 이 전 의원에게 준 돈이 바로 최씨가 말한 9억원일 것이라는 시나리오로 연결된 것이다. 이 전 의원의 폭로는 정확히 1년 만에 엄청난 약발을 발휘하기 시작한 셈이다. 결국 홍걸씨 관련 의혹은 이 전 의원의 폭로전을 계기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홍걸씨 구속으로까지 치닫는다.
미스터리는 두 가지였다. 우선 DJ정권 인사들로부터 ‘홍걸이 스토커’라고까지 불렸던 이 전 의원이 66만달러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바꾸려 했던 이유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당시 “이신범씨는 2년여 동안 미국에서 뚜렷한 직업도 없이 온갖 소송을 벌이고 다니면서 생계가 어려워질 지경까지 처했다. 무엇보다 변호사 천국인 미국에서 소송비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따라서 소송비용 등을 청산하고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홍걸씨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저승사자’처럼 따라다니던 이 전 의원에게 돈을 주기로 한 것을 두고도 온갖 의혹이 제기됐다. 법정 싸움이란 매듭을 풀기 위해선 궁지에 몰려 있던 홍걸씨측이 변호사 비용을 댈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또 이희호 여사가 고통받는 ‘막내 아들’을 위해서 타협을 시도했다는 동정 섞인 분석도 있었다. 반면 “홍걸씨가 자신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이 전 의원에게 돈을 줘서라도 입막음을 하려 했다”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됐다.
똑같은 ‘DJ저격수’였지만 두 사람의 개인적 운명은 엇갈렸다. 이 전 의원은 DJ정권 말기에 치명타를 날렸지만 정작 자신은 정치적으로 패배했다. 반면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은 수많은 폭로전을 주도했던 정 의원은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