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 정리 칼 뺄까 말까
정 회장의 비서실장직은 김경배 신임 실장 이전에도 업계 인사들의 주목을 곧잘 받았던 자리다. 지난 2005년 10월 정 회장은 당시 입사 10년차로 35세였던 이봉재 부장을 이사로 승진시키면서 비서실장에 발탁한 바 있다. 이봉재 이사는 발탁 초기 ‘너무 젊다’는 여론 속에서도 정 회장의 마음을 비교적 잘 헤아리는 것으로 평가받았으나 지난해 3월 13일 배원기 전무에게 비서실장직을 넘겨주게 됐다. 그런데 그로부터 13일 후인 3월 26일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서막을 알리는 검찰의 현대차 사옥 압수수색이 이뤄졌고 한 달 후 정 회장은 구속수감되는 비운을 겪었다. 배 전무는 올 2월 엠코 경영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정 회장의 구치소행과 1심 실형 선고를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업계 인사들은 정 회장의 김 상무 발탁 배경에 고 정주영 명예회장에 대한 그리움과 선친을 오래 모신 김 상무에 대한 배려 등이 깔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김 상무의 비서실장직 입성이 현대차 내부 사정에 따른 인사였다고 평한다. 정 회장 구속수감 이후 보석 석방 그리고 1심 유죄판결까지의 과정에서 정 회장이 측근들에 대한 불만을 자주 표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올 2월 이후 비서실장직 공석 배경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았다. 항소심 판결 이후 신임 비서실장 발탁을 필두로 한 대대적인 그룹 인사 가능성이 점쳐진 것이다. 그러나 정 회장 항소심 선고가 여러 차례 연기되면서 비서실장 공석 기간 또한 길어졌다는 평이다.
두 번의 공판 연기 끝에 잡힌 7월 31일 항소심 선고공판 일정마저 8월 31일 변론재개로 미뤄지면서 항소심 선고는 빨라야 10월 중에나 가능하게 됐다. 이런 까닭에 일단 장기 공석이 된 비서실장직이 왕회장 가신 출신으로 긴급수혈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신임 비서실장인 김경배 상무가 현대차그룹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출신이란 점에서 김 실장 윗세대인 현대정공 출신 임원들의 향후 위상에 대한 논란도 제기된다. 일각에선 43세인 김 실장 등용이 정 회장 재판과정에서 이런저런 구설수를 낳았던 고참급 임원들을 향한 정 회장의 제2 수시인사 발판이 될 것이라 보기도 한다. 벌써부터 일부 임원의 퇴진설이 업계 인사들 사이에 거론될 정도다. 그러나 현대정공 출신인 김경배 상무의 비서실 입성이 재판과정에서 곧잘 도마 위에 올랐던 임원들의 입지 강화에 도움을 줄 것이란 평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대차 회장 비서실장의 등용이 그룹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일각에선 비서실 출신인 삼성 이학수 부회장의 사례를 들기도 한다. 회장 비서실장 출신인 이 부회장은 그룹 내에서 이건희 회장 다음 가는 실력자로 평가받으며 이재용 전무로의 승계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현대정공 출신으로 비서실장을 거쳐 현대차 중역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임원들과 그 뒤를 잇고 있는 김경배 신임 비서실장 간에 펼쳐질 역학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