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에 맞는 상품만 골라 만들었나
▲ 이동걸 신임 한국금융연구원장. 금감위 부위원장 시절 ‘삼성생명 발언’으로 삼성과 악연을 맺기도 했다. | ||
이동걸 신임 한국금융연구원장이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거의 모든 가정에서 하나 이상씩 들고 있는 생명보험. 그 보험료가 바가지라니. ‘뚜껑’이 확 열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생보사 상장을 앞두고 금융계 유력인사의 말로 촉발된 보험료 바가지 논란을 따라가 봤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은행들이 출연해 설립한 민간 연구기관. 하지만 정부 용역을 많이 수행해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이 원장은 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활약했고 정책경험도 풍부한 국내 금융분야의 대표적 학자로 꼽힌다. 이 원장의 발언에 상당한 무게감이 실리는 이유다. 어떤 배경이 있는 건 아닐까.
한국금융연구원 측은 “원장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 것일 뿐 (발언의) 배경 같은 건 없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도 짚을 건 짚어야 한다. 그의 말대로 생보사 보험료는 정말 ‘바가지’일까.
보험전문 시민단체인 보험소비자연맹(보소연)은 간단명료하게 “그렇다”고 주장한다. 생명보험사는 이차(예정이율과 실제이율의 차이), 비차(예정사업비와 실제사업비의 차이), 사차(예정사망률과 실제사망률과의 차이)’로 일컬어지는 3대 수익원을 통해 이익을 낸다.
사업비는 보험 모집인 수당과 계약 유지비, 마케팅 비용 등을 포함한 것으로 생보사는 이를 예측(예정사업비)해 보험료에 반영한다. 그렇게 쓰고 남은 돈이 바로 이번에 문제가 된 사업비차익, 즉 ‘비차’다.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생보사 빅3의 비차는 삼성 9893억 원, 대한 8588억 원, 교보 5141억 원이었다. 일단 이 원장이 말한 “각 사별 1조 원대”에는 못 미치지만 상당한 액수로 보인다.
이렇게 차익이 발생하면 유배당 상품의 경우 90%는 계약자에게, 10%는 주주에게 돌아간다. 반면 무배당 상품은 100% 주주 몫이 된다. 현재 생보사들이 취급하는 유배당 상품은 거의 없다. 결국 이 차익은 모두 주주 몫이 되는 셈이다. 조연행 보소연 사무국장은 “생보사들이 계약자 몫을 주지 않아도 되는 무배당 상품만 취급하면서 사업비를 무조건 비싸게 책정해 소비자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배당 상품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무배당 상품은 배당이 없는 대신 보험료가 낮고 보장 범위가 넓은 이점이 있다. 그런데 가격 차이는 상대적인 것. 하지만 비교할 수 있는 유배당 상품이 없다. 싼지 비싼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생보사가 책정한 사업비가 적정한지 판단할 기준도 없다는 게 보소연의 주장이다. 조 국장은 “이동걸 원장은 이 내용을 다 알고 화두를 던진 것이다. 생보사들이 사업비 내역을 공개하고 관리감독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이 원장의 발언과 시민단체의 주장에 대해 생보사들은 펄쩍 뛰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말도 안 된다”는 것. 먼저 “각 1조 원대”라는 비차 액수는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삼성생명의 한 관계자는 “그렇게 이익을 많이 내면 정말 좋겠다”라고 비꼬며 “1조 원에 가깝게 나온 비차는 사업비 집행을 한눈에 보기 위한 단순한 수치다. 사실 실제 사업비는 두 배 정도 더 들어간다. 현재 회계방법에 문제가 있어 금융당국도 현실에 맞는 현금흐름방식으로 개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보다 비차가 적게 나온 대한·교보 관계자도 “비차가 1조 원은커녕 훨씬 적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다음은 ‘바가지’에 대한 반론. 대한생명 관계자는 “IMF 때 금리가 20% 가까이 올랐었다. 그때 계약한 상품들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고 생보사들은 ‘이차’에서 심각한 손해를 보고 있다. 생보사도 기업이고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 한다. 사차와 비차를 합쳐 겨우겨우 당기순이익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원장과 시민단체의 주장대로라면 계속 손해를 보고 장사를 하라는 얘기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생보사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생명보험업은 규제산업이다. 예정사업비를 비롯한 보험료 책정은 관리감독기관의 가이드라인 안에서 적정하게 하고 있다. 만약 바가지라면 당국이 내버려 뒀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들은 또 “유배당과 무배당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주주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비자들의 선택에 의해 상품이 팔리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생보사들은 현재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4월 생보사들은 1조 5000억 원대 사회공헌기금 출연을 발표했고 금감위는 ‘계약자 몫 배정 없는’ 상장안을 의결, 상장의 길이 열렸다. 현재 상장 1번타자로 거론되는 곳은 교보생명. 지급여력비율을 올리기 위해 3700억 원대 유상증자를 결정하고 한발한발 상장의 길로 가고 있다.
반면 계약자 몫 배정 없는 상장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뒤이어 민사소송 등 어떻게든 상장을 저지하겠다며 맞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바가지’ 발언은 생보사 상장 작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생보사들이 돈 보따리를 더 풀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에 대해 생보사들은 “상장을 위한 제도적인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면서 “이제 생보사들이 기준을 갖춰 상장 절차를 밟으면 되는 시기상의 문제로 (이 원장의 발언이)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한편 삼성생명 관계자는 이 원장 발언의 배경에 대해 색다른 관측을 내놔 눈길을 끈다. 그는 “한국금융연구원이 이름만 보면 무슨 정부산하기관처럼 보이지만 이익단체인 은행연합회가 세운 것”이라면서 “기본적으로 은행에 유리한 방향으로 연구하고 보험 등 다른 산업과 각을 세워야 하는 위치임을 감안하면 그의 발언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