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위해 버티라더니…’ 지도부 향한 의구심 고개…“북 주도 통일 자신감 상실” 해석도

이 대통령 유화적 제스처에 북한 측 반응은 미지근했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은 8월 20일 조선중앙통신 담화문을 통해 “이재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위인이 아니”라면서 “한국은 우리의 외교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김여정은 “최근 서울이 우리에 대해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마치 한국의 대조선 정책이 급선회하고 있는듯한 흉내를 내고 있다”며 “제멋대로 희망과 구상을 내뱉는 것이 풍토병이란 생각이 들 정도”라고 날을 세웠다.

정례적인 한미연합훈련에 극도의 예민함을 보이는 북한 지도부 특성이 되풀이되고 있는 양상이다. 사실상 북한이 ‘대화 재개 조건’으로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김정은과 김여정의 반응에선 ‘외교’ ‘한국’ 등 단어를 통해 한국이 통일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피력했다.
다만 ‘통일 백지화’ 국면이 북한 내부에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의 말이다.
“북한 주민들이 고난의 행군, 극심한 생활고, 화폐가치 추락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견뎌 온 이유는 ‘통일’이었다. 북한 지도부는 언제나 조국통일과 민족해방이란 키워드로 인민을 결집시켰다. 먼 훗날 통일을 하기 위해 이 어려움들을 견뎌야 한다는 인식이 북한 주민 사이에서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남과 북이 모두 통일에 대해 한 발짝 물러서고 있다. 북한 주민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고난을 견뎌낸 이유가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최근 달라진 남북 통일 스탠스가 북한 주민 민심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먼저 통일에서 한 발짝 물러선 쪽은 북한이다. 북한은 2024년부터 ‘선대 지우기’와 ‘적대적 두 국가론’을 빠르게 추진했다. 공식 문건 등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다. 우리나라를 과거 남조선이라 부르던 북한은 최근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통해 거리두기에 나서고 있다.

2024년 ‘적대적 두 국가론’이 본격화될 당시 전·현직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한국 쪽 경계심을 약화하려는 위장전술일 수 있다”며 의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엔 전혀 다른 기류가 감지된다.
한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북한은 모든 역량을 조국통일과 민족해방을 위해 쏟아 붓던 집단인데, 앞으로 어쩌려고 ‘통일 불가론’을 전면에 내세우는지 잘 모르겠다”며 “통일이란 목적을 부정하는 것은 김정은이 ‘백두혈통’을 부정하는 것으로도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직 정보 관계자는 “김정은이 통일을 포기하려는 노선을 확실히 잡은 것은 맞아 보인다”며 “대등한 입장에서 통일을 하거나, 통일 이후 남쪽을 장악할 수 있는 추진 동력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관계자는 “선대 흔적을 지우면서까지 통일 불가론을 외치는 상황은 상당히 이례적”이라며 “김정은의 통일 포기는 향후 집권 동력에 영향을 미칠 만한 중대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김정은 지도부가 통일 불가론과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운 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선 동요가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 주민들 입장에선 지도부에서 갑자기 통일이 필요 없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것”이라며 “그동안 밥을 굶을 때나, 돈이 없을 때나, 살기 어려울 때 북한 지도부는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을 위해 버티라’고 주문해 왔다. 주민들 입장에선 민족 통일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견뎠는데, 하루아침에 통일 필요성을 부정하는 지도부 입장을 바라보며 의구심과 분노 등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김정은의 통일 불가론에 북한 내부 반발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후계자인 김정은이 선대 유훈인 ‘민족 통일 개념’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모순점이 도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에 나선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동안 북한은 외부 사정과 무관하게 김일성이 항일투쟁 및 조국 독립을 이뤄냈다고 선전해 왔다. 김일성 우상화의 출발점이 된 사안들이다. 그런데 김정은이 김일성 우상화 근본을 건드리는 발언을 한 셈이다.
대북 소식통은 “‘한반도 해방이 러시아 덕분’이라고 말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측 승리가 해방으로 이어졌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김일성이 자력으로 독립을 일궈냈다는 그동안의 선전이 거짓이었음을 자백한 셈”이라고 했다. 그는 “김정은 정권 유일한 정통성이나 다름없는 김일성 우상화까지 건드리면서까지 적대적 두 국가론을 심화하고 있는 이면엔 ‘북한 주도 통일’에 대한 자신감 상실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