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교차로에서 직진 혹은 우선멈춤
▲ 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있었던 대·중소기업 상생회의에 참석한 4대 재벌총수의 모습. 왼쪽부터 최태원 SK 회장, 구본무 LG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 | ||
직접 대북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개성공단 분양업무를 대행해온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의 수행단 참여는 유력해 보인다. 조석래 전경련 회장과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이희범 무역협회장 등 주요 경제단체 대표들의 참여도 예상된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의식한 것으로 비치면서 잠시 논란이 됐던 조석래 회장의 경제대통령 발언 구설수가 수행단 구성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런 경제 단체장 등의 수행단 참여는 애초부터 예상된 일인 터라 관심은 4대 그룹 총수들에게로 쏠린다. 4대 그룹은 정부의 요청이 있을 것으로 보고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지만 총수들이 직접 나설지는 미지수다. 각각 대북문제와 정치적 상황에 얽힌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4대 재벌 총수들의 속내엔 무엇이 담겨있을까.
지난 2000년 1차 정상회담 때는 경제단체 대표들을 비롯해 구본무 LG 회장과 손길승 당시 SK 회장, 고 정몽헌 현대 회장, 윤종용 삼성 부회장 등이 수행했다. 주요 재벌의 고위 인사들이 대부분 참여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어떨까. 정부는 그동안 대북사업에 필요한 기업을 우선순위로 포함시킨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4대 그룹 총수의 직접 참여가 노 대통령의 방북 상징성을 높여주고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현 정부가 이번 정상회담에 사활을 걸 것이란 관측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돌던 것이었다.
4대 그룹 역시 수행단 참가 의사를 밝혀왔으나 겉모습만큼이나 속표정까지 밝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 대기업 총수가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 공식일정을 미리 잡아놨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재계 인사들 사이에 ‘방북 수행단에서 빠지려는 꼼수’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2000년엔 방북 주체인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정국을 주도하던 상황이었으며 차기 대선까지는 2년여가 남아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움츠러든 기업들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던 점도 방북 수행단 참여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현 정권 말기에 치러지는 이번 정상회담은 야당으로부터 정치적 이벤트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대북송금 특검과 정몽헌 회장 작고 이후 ‘대북사업 후유증’이란 표현이 재계 인사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나돌았던 점이나 4대 재벌이 대북사업 진출에 미온적이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당초 8월 말로 잡혀있던 정상회담 일정이 10월 초로 미뤄지면서 그때까지의 정국 추이를 장담할 순 없지만 최근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기세가 범여권 후보들을 압도하는 점 또한 재벌 총수들에게 고민거리일 것이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현 정부가 주창해온 금산 분리 원칙에 대해 비판을 가해왔다. 재계 인사들은 금산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지배구조 개선 고민에 빠진 삼성 같은 재벌은 현 정부보다 차기 정권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지난 7월 4일 동계올림픽 개최지 결정일까지 평창 유치를 위한 해외 활동에 전력을 다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이 회장의 대외 활동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열망했던 정부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합했던 점만큼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 행렬에도 이 회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지는 미지수다.
에버랜드 사건 재판부가 검찰이 기소한 에버랜드의 손해액 970억 원 중 10분의 1도 안 되는 89억 원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한 항소심 판결 내용도 이 회장 행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항소심 판결 이후 삼성 지배구조 문제에 대한 논란도 전보다 다소 식은 상태고 이건희 회장 소환 가능성도 물 건너 갔다는 평가 속에 이 회장이 임기 말 정권의 행사에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지 궁금해진다. 아울러 주력인 제조업 분야가 주춤거리는 가운데 삼성이 대북사업에 연루될 여지를 만드는 것조차 피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대북송금 특검 파문으로 홍역을 겪은 현대차 정몽구 회장 역시 정상회담 수행단 참여에 미온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초 8월 28일 시작될 예정이었던 정상회담이 정몽구 회장 항소심 공판일정과 맞닿아 있어 수행단 참여 가능성이 희박했다. 하지만 회담 일정이 10월로 연기돼 상황을 알 수 없게 됐다.
정 회장 입장에선 대북사업에 연루되는 것이 달갑지 않을 뿐더러 지금까지 수차례 연기돼 온 공판 일정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판에 주력하면서 11월 27일 개최지가 결정되는 여수세계박람회 유치활동에만 전력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게다가 옛 현대그룹 시절부터 자동차 사업 부분은 남북경협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반면 지난 1차 정상회담 때 그룹 회장들이 직접 수행단에 참여했던 SK와 LG의 입장은 유동적일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이 10월로 연기돼 시간을 번 터라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건 대법원 판결을 남겨놓고 있는 최태원 회장과 지난해 SK에 재계 서열 3위를 내주고 나서 절치부심 중인 구본무 회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관심이 쏠린다. SK는 최근 지주회사제 전환을 마쳤지만 최태원 회장이 지주회사를 지배하지 못하는 기형적 구조를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며 LG는 주력인 LG전자 등 제조업 분야의 부진을 타파하고 신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정상회담 일정이 8월 말에서 10월 초로 연기되면서 한 달 이상 시간을 번 터라 수행단 참여 여부에 대한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법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