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작품 ‘개인은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질문…불안 시대 걷는 우리에게 인문학이 인간다운 길 제시
[일요신문] 올여름, 맹렬한 무더위 속에서 서울 강남구립 못골한옥어린이도서관에서는 ‘용재총화’(慵齋叢話) 강좌가 열렸다. 조선 전기의 문인 성현(成俔)이 남긴 이 책은 역사와 풍속, 예술과 일화가 망라된 기록으로, 단순한 잡록이 아니라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띤다. 성현은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 사회의 본질을 읽어내고자 했다. 이날 강연자는 ‘용재총화’에 담긴 풍속과 예술, 그리고 일상 속 지혜를 풀어내며 “사람은 시대와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성현의 통찰을 강조했다. 강의를 들은 시민들은 오래된 기록이 결코 낡은 것이 아니며 지금 우리 삶에도 적용 가능한 지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두 강좌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추진하는 대표적인 인문학 정책 사업인 ‘지혜학교’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지혜학교는 대학 교양 수준의 심화 과정을 표방하며, 전국 200곳에서 13주 동안 매주 3시간씩 진행된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긴 강좌임에도 오히려 시민들의 열기는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단순히 강연을 듣는 차원을 넘어 토론과 대화가 이어지고, 인문학을 통한 공론장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인문학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일까.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사상, 문화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학문적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이 우리에게 길러주는 힘이다. 바로 생각하는 힘, 질문하는 힘이다. 인문학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묻고, 성찰하며,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기른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개인을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바탕이 된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힘이 공동체를 향한 책임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개인은 사회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도서관 현장에서 목격되는 변화는 이 같은 힘을 잘 보여준다. 지혜학교 같은 인문학 강좌를 매개로 도서관은 더 이상 책을 빌려주는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강연이 끝난 뒤에도 소모임을 꾸려 책을 함께 읽고 토론을 이어간다. 도서관이 공론장의 중심으로 기능하며 지역 문화를 형성하는 거점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방배숲환경도서관의 이다정 선임사서는 “도서관은 지역사회의 생활과 문화의 중심 공간이다. 인문학 강좌를 통해 다양한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지역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인문학은 개인의 변화를 넘어 지역 사회를 변모시키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인문학 지원 예산은 오랜 기간 점점 줄어들었고, 현재 국가 연구개발 예산 중 인문학 비중은 1% 남짓에 불과하다. 개인과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키워야 할 시점에 오히려 기반이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현 정부의 국정과제에 ‘인문역량개발’이 포함되면서 다시금 인문학 발전의 기회가 열렸다. 문제는 이 기회가 단발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지속성과 일관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인문학을 경제성이 낮은 분야로 치부하며 소홀히 한다면, 우리 사회는 공동체를 지탱할 토대를 잃게 될 것이다.
#미래를 위한 자양분으로서 인문학
다시 성현과 카프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용재총화’와 ‘소송’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탄생했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성현은 질서와 교양을 통해 사회적 조화를 강조했고, 카프카는 제도의 불합리 속에서 고립되는 개인의 비극을 드러냈다. 한쪽은 교양으로 공동체의 힘을 북돋우려 했고, 한쪽은 체계적 합리성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이 시선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카프카적 불안을 경험한다. 자본주의적 효율과 합리성은 어느덧 우리 삶의 기준이 되었지만, 정작 개인은 수많은 통제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규정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용재총화’가 보여준 것처럼 공동체적 교양과 관계의 회복을 필요로 한다.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인간관계마저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현실에서 교양과 문화적 자산은 사회를 지탱하는 숨은 힘이 된다. 마치 현재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카프카의 질문에 인문학이 그 대안이라고 성현이 답하는 것 같다.
그렇다.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에 대한 갈증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관계의 단절, 소외, 불안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의 가치는 분명해진다. 성현이 보여준 사회적 교양의 힘, 카프카가 던진 실존적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절실하다. 그리고 시민들이 고전을 함께 읽고 토론할 수 있도록 하는 ‘지혜학교’ 같은 인문학 사업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공공 자산이다.
인문학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아니다. 오히려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인간다운 길을 보여주는 힘, 그것이 인문학이다. 공공의 힘으로 인문학을 지켜내는 일은 단순한 문화 정책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품격을 지키는 일이다.
진형우. 예술단체, 세종문화회관, 문화도시센터장을 역임한 문화예술 기획자다. 문화에는 ‘동기, 방법, 움직임, 강렬함, 행동’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정의돼야 한다고 믿으며 하루를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진형우 문화예술 기획자 mast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