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에게도 ‘굉장한 모험’이었던 작품…“촬영마다 놀라운 경험 연속”
‘쓰리, 몬스터’(2004)로부터 21년, ‘공동경비구역 JSA’(2000)로부터는 무려 25년 만에 만나게 된 박찬욱 감독과의 세 번째 호흡이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로 오랜만에 박 감독의 ‘박찬욱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배우 이병헌(55)은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를 떠올리며 “‘이거 웃기는 영화 맞죠?’라고 몇 번이고 물었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기사에는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25년 경력의 제지전문가 만수가 어느 날 덜컥 해고된 뒤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어렵게 장만한 내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극 중 이병헌이 맡은 만수는 하루아침에 실직하게 돼 지옥을 오가던 중, 자신을 위협할 만한 재취업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할 것을 결심한다.
“저는 만수가 굉장히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라 생각하고 접근했어요. 그러니 평범한 사람이 내리지 못할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길 때 우왕좌왕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죠. 그 계획을 꾸역꾸역 실행해가면서 흔들림도, 두려움도 많았을 거예요.”

이처럼 평범한 가장이 연쇄살인마가 되는 과정의 설득력을 관객들에게 직접 주입시켜 주기라도 하듯 만수는 반복적으로 가족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우린 지금, (어쩔 수가 없이) 전쟁 중이잖아.” 자기가 말하는 ‘전쟁’은 혼자 하고 있고, 가족들은 다른 ‘어쩔 수’를 생각해 내 조언하지만 만수에겐 들리지 않는다.
“만수는 이게 진짜 ‘나만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고 가족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날로그식 사고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만수는 마초 기질도 살짝 가진 가부장적인 캐릭터거든요. 이 모든 일들은 그런 기질에서 비롯돼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서’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거죠. 내가 재취업에 성공해 되찾은 내 집에서 우리 가족들이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어떻게 보면 자기만의 욕심일 수 있는데도 스스로 ‘내가 혼자 살인을 저질렀지만 이건 가족을 위한 거야’라고 믿고 있어요. 참 독단적인 인물이죠(웃음).”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범죄를 저지르지만 ‘어쩔수가없다’ 속 만수는 끝까지 어설픔을 간직하고 있다. 범행 도구인 권총에 지문이 남을까봐 여러 겹을 꼈던 장갑을 하나씩 벗어던지느라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고, 광분한 타깃의 아내에게 쫓겨 비명을 지르며 산 비탈길을 혼비백산 뛰어가는가 하면, 덩치가 큰 시신 처리를 놓고 어찌할 바 모르다가 자신의 취미였던 분재를 가꿔내듯 예쁘게(?) 포장하기도 한다. 특히 이 인간 분재 신을 두고 박찬욱 감독이 “영화 포스터로 만들고 싶었는데 못했다”고 살짝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이병헌은 “그랬으면 아주, 진짜 마니아용 영화가 됐을 것”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박찬욱 감독이 그 답게 만들어낸 영화다. 잔인한 장면이 없는데도 잔인하게 느껴지는 엔딩이 이병헌의 마음속에 진하고도 깊게 각인됐다고 한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 결말이 과연 ‘꽉 닫힌 배드 엔딩’인가, 그렇지 않다면 ‘시한부로라도 해피 엔딩’인가에 대한 의견이 갈렸지만 이병헌만큼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진 비극적 엔딩”이라고 정의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