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140년 만에 일본 정치사의 금기가 깨졌다.” 강경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64)가 일본의 새로운 총리로 선출됐다. 일본이 내각제를 도입한 1885년 이후 사상 첫 여성 총리다. 남성 중심의 정치 구조가 뿌리 깊은 일본 사회에서 여성 총리의 등장은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직후 기자회견에서 “강한 일본 경제를 만들고, 외교와 안보에서 국익을 지켜내겠다”고 밝혔다. 신임 내각은 출범과 동시에 고물가 대책 및 예정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일 등 복합적인 현안을 마주하고 있다. 중·참 양원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소수 여당 체제 속에 다난한 출발이 될 것으로 보인다.
10월 20일 요시무라 히로후미 일본유신회 대표(왼쪽)와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가 연정 합의문에 서명했다. 사진=EPA/연합뉴스#총리 오르기까지 우여곡절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가 일본 총리에 오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통상적으로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면 총리직은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1992년 1월, 자민당의 당원 수는 546만 명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그러나 30여 년이 흐른 지금, 올해 9월 기준 당원 수는 91만 5574명에 불과하다. 자민당 당원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은 다카이치였지만, 총재 선거가 끝난 뒤에는 ‘정당성’ 논란이 불거졌다. 당원 수가 크게 줄어든 데다, 60대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편중된 모집단에서 선출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만약 당원층이 넓고 세대가 다양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자민당의 오랜 파트너였던 공명당이 연립정권 이탈을 선언하며 상황은 더욱 꼬였다. ‘중도 성향’의 공명당은 다카이치 총재가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에 연루된 옛 아베파 의원을 간사장 대행으로 임명한 데 반발했다. 자민당의 중의원(하원) 의석은 196석. 만약 야당이 단일 후보를 내세운다면, 총리 지명선거에서 다카이치가 패할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궁지에 몰린 다카이치는 새 연정 상대를 찾아야 했다. 결국 보수색이 짙은 제2야당 일본유신회(35석)와 손을 잡으며 기사회생했다. 10월 21일 열린 임시국회 총리 지명선거에서 다카이치는 중의원 465표 가운데 절반(233표)을 넘는 237표를 얻어, 결선 투표 없이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유신회 합류로 보수색 더 짙어져
자민당의 보수화에 제동을 걸어왔던 공명당이 떠나고, 강경 보수 성향의 유신회가 새 파트너로 합류하면서 다카이치 정권의 우경화를 염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자민당과 유신회가 맺은 연정 합의에는 ‘평화헌법 9조 개정’ ‘스파이방지법 제정’ ‘방위 장비 수출규제 완화’ ‘외국인 규제 강화’ 등 강경 색채의 정책이 다수 포함됐다. 아사히신문은 “공명당 대신 유신회가 들어오면서 정권의 보수색이 한층 짙어졌다”고 분석했다.
아사히신문은 “공명당 대신 유신회가 들어오면서 정권의 보수색이 한층 짙어졌다”고 분석했다. 4월 22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마치고 기자들 앞에 선 다카이치. 사진=교도/연합뉴스다카이치 총리는 곧바로 내각 인선을 단행했다. 내각은 자민당 내 우익 인사들로 구성됐으며, 새 연정 파트너인 유신회는 ‘내각 외 협력’ 원칙을 유지해 입각하지 않았다. 정부 대변인이자 내각의 2인자인 관방장관에는 기하라 미노루 전 방위상이 임명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정기적으로 참배해온 인물로, 지난해에도 현직 신분으로 참배해 주변국의 반발을 산 바 있다.
총재 선거에서 경쟁한 후보들을 요직에 기용하긴 했지만, ‘거당 체제’ 구축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결선에서 맞붙었던 고이즈미 신지로 전 농림수산상을 방위상으로, 3위였던 하야시 요시마사 전 관방장관을 총무상으로 임명했다. 결선에서 다카이치를 지지한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외무상으로 기용됐다.
일각에서는 다카이치 총리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일본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기대하는 시각도 있으나 “성평등보다는 전통적 우파 정책 강화에 무게를 둘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그는 선택적 부부별성(夫婦別姓) 법제화에 반대하고, 일왕의 남계 남자 계승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새 내각에는 여성 각료를 단 두 명만 임명했다.
대규모 세출 확대와 감세를 내건 다카이치의 경제 정책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확장 재정이 물가 상승과 엔저를 가속해 일본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다만, 노무라종합연구소의 기우치 도에이 이코노미스트는 “유신회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정당으로, 적극 재정·금융 완화를 주장해온 다카이치 총리와는 상반된 노선을 갖고 있다”며 “유신회와의 제휴가 다카이치 색채를 어느 정도 억제해 균형 잡힌 경제운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김 좋아하는” 다카이치 한일 외교 노선은?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선출은 해외에서도 일제히 보도되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첫 여성 총리, 헤비메탈 드러머 출신의 강경 보수파’라는 제목으로 “아베 신조 전 총리처럼 일본을 오른쪽으로 이끌려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BBC는 “다카이치가 두 번의 실패 끝에 오랜 정치적 야망을 이뤘다”며 “그의 목표는 일본의 ‘철의 여인’이 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프랑스 AFP통신은 “여성 정치 참여의 한 걸음 전진이지만, 일본의 가부장적 규범에 맞서는 태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방송은 “다카이치는 영국 최초 여성 총리인 마거릿 대처의 열렬한 팬으로 그는 일본의 철의 여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사진=TBS 뉴스 캡처아시아 각국의 반응은 엇갈렸다. 대만의 라이칭더 총통은 친대만 성향으로 알려진 다카이치 총리의 선출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일본과의 우호 관계 심화에 기대를 표했다. 반면 중국 외교부의 궈자쿤 대변인은 “일본이 중·일 4대 정치문건의 원칙을 준수하고, 역사·대만 문제에서의 약속을 지키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공산당 기관지 환구시보는 “다카이치의 매파적 자세가 외교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고, 차이나데일리는 “이시바 시게루 정권에서 비교적 양호했던 한국, 중국과의 관계가 위기에 노출될 것”이라며 경계감을 나타냈다.
다카이치 총리는 곧 외교 무대에 오른다. 10월 하순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가 잇따라 열릴 예정이어서 취임 직후부터 외교 수완이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와세다대학 나카바야시 미에코 정치학 교수는 “다카이치 총리가 외교나 안보를 직접 담당한 경험이 없어 구체적 전망을 내기 어렵다”면서도 “역사 인식과 관련한 강경 발언은 지지층 결집을 위한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다카이치가 한국과의 외교에서 현실적인 노선을 모색할 것”이라고 짚었다.
다카이치 총리는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일본에 중요한 이웃이자 국제사회의 다양한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파트너”라며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이재명 대통령과의 조기 정상회담도 희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여러 가지 우려가 있는 것 같지만, 나는 한국 김을 정말 좋아한다”면서 “한국 화장품도 사용하고 있고, 한국 드라마도 보고 있다”며 한국을 향한 친밀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