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누구도 본 적 없는 ‘낯설고 서늘한 김유정’…“독기 빼고 만든 캐릭터, 더하지 않고 덜려고 해”

“백아진은 절대 응원할 수 없는 사람이죠. 주인공이기도 하고 제가 맡아야 하는 캐릭터라 이해보단 온전히 그 행동 자체로만 받아들이려 했어요. 대본에 백아진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충분히 설명돼 있기도 했고요. 저는 아진이가 굉장히 처절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욕망이 잘 보였기 때문에 그 부분에 중점적으로 접근하려 했어요.”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친애하는 X’는 지옥에서 벗어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가면을 쓴 여자 백아진과 그에게 잔혹하게 짓밟힌 X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김유정이 연기한 백아진은 아름다운 외모 너머 잔혹한 본성을 숨긴 대한민국 최고의 톱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파멸로 이끄는 소시오패스적인 인물이다. 극한의 상황 속 어디로 치닫을지 알 수 없는 이 인물이 가진, 조용하지만 강력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해 내야 했던 김유정은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사실 백아진을 연기할 때는 레퍼런스처럼 제가 따라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웹툰 원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죠. 웹툰의 특성상 이미지가 멈춰 있기 때문에 백아진이 가진 소시오패스 성향이 더 극대화돼서 잘 보이는데, 이걸 영상화할 땐 어떻게 해야 최대한 비슷한 결로 맞출 수 있을지 고민이었어요. 그러다 결국 조금 덜어내고, 절제했을 때 그런 모습이 잘 보이겠다고 깨달았죠. 속내를 알 수 없는 백아진의 미묘한 표정을 표현할 때 특히 그걸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어요.”

“실제 ‘친애하는 X’를 촬영하면서 살도 많이 빠졌어요. 아무래도 백아진이 겪고 있는 상황들이 너무 극단적이다 보니 연기하는 저 역시 심리적으로 점점 가라앉는 느낌을 받고 있었죠. 하지만 촬영 당시엔 그 마음을 떨쳐내지 않으려 했어요. 오히려 그게 아진이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껴서 계속 유지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제 곁의 많은 분들이 촬영하지 않는 시간 속에 제가 ‘저 자신’으로 있을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주셔서 저를 잃지 않고 잘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유정에서 백아진으로 변화할 때 무엇보다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시선’이었다. 눈동자는 제 앞의 사람과 시선을 맞추고 있지만, 상대를 바라보기보다 그 너머를 꿰뚫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려 했다. 시선은 이곳에 뒀어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인물로 보이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싸늘하게 연기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연기하면 ‘싸늘한 척’처럼 웃겨 보일 수 있어요. 고민한 끝에 일부러 삼백안처럼 보이는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시선이 허공에 떠 있는 느낌으로, 백아진의 눈빛에서 오는 에너지에 특히 중점을 두려 했죠. 사실 저는 연기할 때 배우들의 눈을 보고 감정을 공유하면서 느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입인데 백아진은 ‘나를 보고 있는데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실제 촬영장에서 다른 배우들이 저와 연기할 때 ‘왜 호흡이 안 맞지?’라고 느끼면 어떡할지가 가장 걱정됐었어요. 연기하기 전 그런 부분에 양해를 구하기도 했고, 또 이렇게 안 맞을 수 있는 부분을 상쇄시키기 위해 서로 자주 만나고 사적인 얘기도 많이 나눴죠. ‘방 탈출’도 하러 가고, 공연도 보러 가고, MT도 가고(웃음).”

“사실 저희 분위기가 워낙 좋아서 그런 해프닝이 생겼던 것 같아요. 아직도 저는 (김)도훈 배우가 재오로 보일 만큼, 재오 그 자체를 너무 완벽하게 표현해주신 배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고마움도 많이 느끼고 있고요. 저희들은 이야기의 초반부터 함께 쭉 같이 갔기 때문에 서로를 제일 많이 의지하고 있었어요. 다 같이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윤준서 역의 (김)영대 배우도 마찬가지예요. 촬영 시작 전부터 이미 친해져 있는 상태였으니 호흡도 안 맞을 수 없었죠(웃음).”
다소 엉뚱한 해프닝이 불거지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이는 실제 배우들의 호흡이 극 중 캐릭터들의 케미스트리만큼 좋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동안 대중들에게 제대로 보여준 적 없었던 서늘한 악녀로서의 연기 변신도 성공적으로 해냈고,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제작진과 동료·선후배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김유정에게 ‘친애하는 X’는 꽤 오래도록 가슴 속에 깊이 남아있을 작품이 됐다. 올해로 데뷔 22년 차를 맞이한 베테랑 배우 김유정은 또 어떤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줄지도 관심사다.
“개인적으로 시행착오를 참 많이 겪었어요. 지금도 아직 겪고 있는 중이라고도 생각하고요. 제가 제일 자주 생각하는 게 스스로에게 실망했을 때 오는 커다란 감정 같은 것들인데, 그런 감정을 멀리하고 싶어 어떤 상황에서도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아요. 기대치를 항상 낮추는 편이죠. 그러다 보니 일이 생각대로 잘 안 풀리거나 내 계획이 틀어질 때에도 ‘그럴 수 있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이 생겨요. 그렇게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잘 털어내서 제가 해왔던 대로 많은 분들이 편하게 보실 수 있는 작품을 즐겁게 해나가려고 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