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짱 뜨다 상대 숨지게 한 20대남 ‘결투죄’ 체포…메이지 초기인 137년 전 제정된 특별법 이례적 적용

사건은 지난해 9월 23일 새벽, 일본 최대의 환락가로 불리는 도쿄 가부키초에서 벌어졌다. 숨진 피해자는 마쓰다 나오야(당시 30세)다. 경찰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사건 당일 처음 만난 사이로, 함께 장기를 두다 말다툼으로 번졌다”고 한다.
둘은 약 10분간 결투를 벌였고, 결과는 아사리의 승리였다. 패배한 마쓰다는 당시 의식이 있는 상태였지만, 사흘 뒤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고, 약 3주 뒤 숨졌다. 사인은 다발성 장기부전이었다. 경찰은 “결투 과정에서 입은 뇌 손상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고 아사리를 상해치사 및 결투죄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 조사에서 아사리 용의자는 “말다툼의 계기는 사소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상대가 사망한 것에 대해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혐의를 인정했다.
사건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 것은 137년 전 일본에서 제정된 이른바 ‘결투 금지법’이다. 이 법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89년에 만들어진 특별법으로, 현재도 일본 법체계 안에 남아 있다. 쌍방이 사전에 합의해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폭력을 수반한 싸움을 벌였을 경우 적용된다. 해외에서는 대부분의 국가가 결투죄를 폐지한 반면, 일본은 지금도 이를 유지하고 있는 드문 사례로 꼽힌다.
그렇다면 죄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일본 언론에 따르면 “결투에 직접 참여한 경우 최대 5년 이하의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결투를 벌이지 않았더라도, 이를 제안하거나 응하기만 해도 2년 이하의 징역이다. 결투를 거절한 상대방을 비난하는 행위, 결투에 증인으로 입회하거나, 결투 장소를 제공해도 모두 처벌된다.

결투 금지법이 탄생한 배경도 흥미롭다. 이 법이 제정된 시기는 메이지 시대 초기, 서구 문화가 거센 속도로 밀려들던 때였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결투 풍습 역시 일본에 정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결투를 ‘문명인의 풍습’이자 ‘신사적인 행위’로 바라보는 시선이 일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888년 잡지 ‘일본인’의 기자 마쓰오카 고이치는 다카시마 광산의 열악한 노동 실태를 고발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치인 이누카이 쓰요시가 “과장된 부분이 많아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반박 글을 게재해 논쟁에 불을 붙였다. 공방은 끝내 마쓰오카가 결투를 신청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이누카이는 이를 “야만적인 유풍(遺風)”이라며 단칼에 거절했고, 이 역시 큰 화제가 됐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인물이 나타났다.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 고묘지 사부로가 “결투는 문명의 꽃”이라는 논설을 발표하며 결투를 찬미한 것이다. 논쟁은 더욱 격화됐고 이를 계기로 결투를 시도하는 사례까지 잇따랐다고 한다. 결국 메이지 정부는 이 흐름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해 이듬해인 1889년 특별법 형태의 ‘결투 금지법’을 제정했다.
일각에서는 이 법을 두고 “서구형 결투 문화의 유입과 함께, 일본 사회에 남아 있던 에도시대식 사적 폭력이 ‘근대적 행위’로 포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에도시대의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라 불렸던 만큼, 명예를 이유로 한 사적 폭력이 일정 부분 용인되던 사회였다. 적대 관계에 있던 무사들이 거리에서 칼을 빼들고 결투로 번지는 일도 드문 풍경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관습이 바로 ‘원수갚기(仇討ち)’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나 부모, 형제 등 윗사람을 살해한 자에 대해 무사 등이 복수의 형태로 사적 제재를 가하는 관습으로, 에도시대에는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물론 아무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복수는 반드시 아랫사람만 할 수 있었고, 부모나 주군이 직접 나서는 것은 금지됐다. 사전에 막부에 신고해야 했으며, 실행 이후에는 검시를 받는 등 절차도 따랐다.
원수를 갚는 일은 사무라이의 명예와 직결된 문제였다. 가령 ‘추신구라(아코 사건)’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주군의 죽음을 갚기 위해 47명의 무사가 오랜 시간 계획을 세워 원수를 처단한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충성과 의리의 상징으로 소비돼왔다.
하지만, 1868년 메이지 정부가 출범하며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서구식 근대 법체계가 도입되면서 명예를 이유로 한 사적 폭력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았다. 1873년에는 공식적으로 원수갚기 금지령이 내려졌고, 복수를 이유로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는 명확히 살인죄로 규정됐다. 결투 금지법은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에서 다시 한번 원칙을 분명히 선언한 법이다.

현대에 들어 결투죄가 적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일본이 이 오래된 죄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폭력이 개인의 선택이나 합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질서를 해치는 행위라는 점을 법으로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야쿠자(조직폭력단) 간 충돌과 같은 조직화된 폭력 관행에 대한 역사적 경계가 깔려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실제로 현재도 일본에서는 조직폭력단 간 이른바 ‘보스 대 보스’ 싸움에 결투죄가 적용되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결투죄 적발 사례를 보면, 사전에 서로 알고 있었거나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은 뒤 벌어진 결투가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이번 가부키초 사건처럼 당사자들이 ‘초면’이었던 경우에 결투죄가 적용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 변호사는 “주변 증언이나 증거 영상, 사건 이후 SNS 발언 등 어떤 형태로든 결투에 대한 사전 합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했다.
일본 매체 ‘주간SPA!’는 “이번 사건에서 굳이 결투죄를 적용한 의미는 작지 않다”고 짚었다. 최근 사적인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풍조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가운데, 경찰이 분명한 선을 긋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흔히 소년 만화나 격투 게임 속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맞대결’과 달리, 현실에서의 결투가 맞닥뜨리는 결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이번 사건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