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칼날’ 뒤엔 ‘족집게 코치’ 있었다?
▲ 삼성 비자금 수사가 강도 높은 압수수색으로 이어지면서 삼성 측 인사 중 수사당국에 동조 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확산되고 있다. | ||
지난 11월 30일부터 나흘간 실시된 삼성증권 등 계열사 압수수색을 통해 검찰은 차명 의심 계좌들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이 제출한 차명계좌와 비교하며 자금 흐름을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압수수색 전까지만 해도 검찰의 수사팀 구성이 늦어지고 정치권에서 내놓은 특검 발족이 다가오면서 검찰의 수사 의지와 한계에 대한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검찰의 압수수색이 예견돼온 터라 삼성이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조사대상으로 삼을 만한 계좌들이 무더기로 발견됐으니 당초 예상에 비하면 놀랄 만한 실적을 거둔 셈이다.
삼성 비자금 파문을 주시하는 정·관·재계 인사들 사이에선 ‘삼성이 제대로 허를 찔렸다’는 평이 나돌았다. 정보업무 담당자들 사이에선 ‘삼성이 압수수색 대상으로 유력해 보였던 삼성본관과 몇몇 계열사들을 대상으로 모의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오르내렸다. 수사당국에 꼬투리 잡힐 만한 자료 인멸과 동시에 새벽이나 밤 시간에 직원들을 호출해 불시에 닥칠 압수수색에 대비해왔다는 것이다. 수색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아보였던 삼성증권이 검찰의 첫 타깃이 된 것에 삼성 측이 혀를 찼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 삼성본관 야경. | ||
비자금 의혹의 핵심 단서가 될 명단 등을 보관한 삼성증권 감사팀장실이 검찰의 집중 수색 대상이 된 것도 내부 고발자 덕분이었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곳에선 차명계좌 개설에 항의하는 직원들의 전자우편들이 발견돼 검찰 수사를 용이하게 만들어줬다.
감사팀장실의 경우 직원들을 감사하는 데나 익숙하지 감사당해본 경험이 별로 없는 데다 직원들 관련 주요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어 우선 수색 대상으로 안성맞춤이었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선 압수수색에 나선 검찰 직원들이 집어가기 좋은 곳에 내부 자료를 가져다놓은 협력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래저래 수사당국에 협조한 삼성맨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사측에 협박 이메일을 보낸 삼성증권 직원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또한 해당 직원을 통해 차명계좌 개설 배후를 캐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검찰의 압수수색 이후에도 당국에 삼성 비자금 관련 제보를 해오는 인사들이 많다고 한다. ‘관리의 삼성’ 안에서 내부 고발자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말이 나오며 향후 드러날 삼성의 차명계좌와 비자금 규모가 당초 예상을 웃돌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검찰 혹은 특검에 의해 조사선상에 올라 곤욕을 치르느니 제보자가 되는 편을 택한 직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난해 현대차 비자금 사건 당시 현대차 내부인사의 제보가 검찰 수사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됐던 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현대차 사건 제보자 신분이 끝내 공개되지 않았던 점은 협력자에 대한 당국의 비호를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각종 제보들이 이어지다보니 삼성을 더 큰 난항에 빠뜨릴 일이 곧 벌어질 것이란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 몇몇 정보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어느 삼성 계열사 출신 인사가 정·관계를 상대로 삼성 내부 기밀을 흘리고 있다’는 내용이 나돌고 있다. 이 인사가 삼성을 상대로 물밑협상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발언에 버금가는 제2, 제3의 폭로가 뒤따를 가능성마저 거론되는 것이다. 이미 수사당국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현명관 전 회장과 관련해선 지난해 지방선거 때 한나라당 제주지사 후보로 나서며 삼성 측과 갈등을 빚었다는 풍문이 나돈 바 있다. 만약 검찰이 현 전 회장 명의 지분 조사에 나설 경우 수사과정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건희-현명관 갈등설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황 전 사장의 경우 차명계좌 의혹을 즉각 부인하고 나섰지만 검찰은 그에게 출국금지 조치를 내려 수사선상에 올라있음을 알렸다. 황 전 사장이 우리은행장을 역임했으며 우리은행이 삼성 비자금 파문에 연루돼 금감원의 검사를 받는 중임을 감안하면 삼성-우리은행 관계에 대한 수사범위가 어느 정도가 될지 짐작해볼 수 있다.
황영기 전 사장에 대해선 수사당국의 계좌추적까지 이뤄지고 있다. 지난 3월 황 전 사장으로부터 우리은행장직을 물려받은 박해춘 현 행장 또한 삼성화재 전무를 지낸 바 있어 주목을 받는다.
검찰청사에 들어설 땐 “조사 받으며 모든 진실 밝히겠다. 나는 떳떳하다”고 주장했던 무수한 인사들이 취조 받으며 혐의를 인정했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수사당국이 소환대상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혐의들을 제시한 뒤 그 중 핵심이 되는 혐의를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관측이 뒤를 따라왔다.
검찰은 특검 발족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감안해 경영권 승계 문제와 로비 의혹은 특검 몫으로 두고 이미 물증을 확보한 비자금 수사에 주력할 참이다. 만약 계좌주인들이 검찰에 줄줄이 소환될 경우 조사과정에서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뱉어낼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용철 변호사 발언과 삼성증권 압수수색 전후로 쏟아지는 각종 제보들만 보더라도 이미 삼성 전·현직 인사들의 이 회장에 대한 충성심을 전과 같다고만 단언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