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중추세력인 영남권 중진의원들은 최 대표 체제 출범 이후 대체로 몸을 낮춘 채 사태추이를 관망해 왔다. 사회적으로 세대교체 요구가 워낙 큰 데다 최 대표와 불편한 관계를 형성해 당내 입지를 축소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 이에 따라 이들은 최 대표와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을 짜내는 데 골몰해왔다.
최근 이들 영남권 중진들이 최 대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반격을 준비하는 것은 이 같은 기본구도가 허물어졌음을 의미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실정을 거듭, 신당의 위협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으며, 최 대표가 당내 다수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리더십을 보이는 데 따른 틈새를 노린 전략으로 해석되고 있다.
PK(부산·경남)지역 한 중진의원은 최근 사석에서 “최병렬이 더위 먹었나. 도대체 하는 것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최 대표 체제에는 협력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가 밝힌 최 대표의 최대 문제점은 특검법 파동에서 원칙 없이 흔들렸다는 점, 시급하지도 않은 고용허가제를 밀어붙이고 최 대표 본인은 기권한 점, 서청원 전 대표 등 비주류를 껴안지 못하는 리더십의 한계 등이다.
최 대표는 강력한 리더십을 표방했지만 실제 중심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게 이 영남권 중진의원의 불만이다. 그는 최 대표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 특히 “지도위원에 포함돼 있으나 최 대표가 한 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며 “그 같은 협량의 정치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격분했다.
이 중진의원은 국회에서 TK(대구 ·경북)지역 한 중진의원과 만나 같은 고민을 토로했다. TK 중진의원도 지도위원회의에는 나가지 않을 작정이며, 최 대표 체제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공유했다는 것.
이들이 최 대표에게 느끼는 불만의 근저에는 공천 물갈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최 대표는 여러 차례 공천 물갈이 의사를 비쳤고, 당원과 국민이 50 대 50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 경선을 강조하는 등 공천혁명을 시사하는 발언을 해왔다. 최 대표가 구상하는 공천 물갈이에는 영남권 중진들이 집중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
영남권은 3선 이상, 60세 이상 의원들이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고, 당내에선 이들이 1차적으로 물갈이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영남권의 한 중진의원은 “중진들 물갈이를 하려면 최 대표와 홍사덕 총무부터 물러나야 할 것”이라며 “4, 5선인 그들이 물러나지 않고 누구에게 물러나란 요구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배수진을 쳤다.
영남권 중진들은 최 대표 당선 이후 공개적으로 저항하다간 오히려 거꾸로 물갈이 대상으로 찍힐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여 왔다.
그러나 최근 영남권 중진들이 최 대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정국과 당내 상황을 보면서 얻은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한 중진의원은 “이미 의원들이 대부분 최 대표에게 등을 돌렸다”면서 “두고보면 최 대표는 아무 것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실제 의원총회나 당운영위원 회의 등에선 최 대표에게 ‘저항’하는 의원들이 늘고 있다. 과거 이회창 전 총재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있으며, 최 대표 리더십을 비판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최 대표는 당무 운영에서 초선들을 집중적으로 기용, 재선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으며, 중진들마저 등을 돌릴 경우 사면초가에 빠질 수도 있다. 영남권 중진들은 그동안 최 대표의 사실상 최대 지지기반으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부산 출신인 최 대표는 부산·경남에 대한 장악력에 대해선 어느 정도 자신해 왔다.
실제 부산·경남에는 최 대표를 공개적으로 도왔던 의원들이 많다. 유흥수, 김종하 의원을 비롯해 권철현, 정형근 의원 등은 초기부터 최 대표 지지파였다. 최 대표 당선에는 부산·경남의 높은 지지율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반면 최 대표 반대파도 적지 않다. 하순봉, 박희태 의원들은 최 대표와 불편한 관계를 형성해왔고, 경북의 정창화 의원도 최 대표와 원만하지 못하다. 하순봉 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 시절 최 대표와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싸운 적이 있을 정도다.
최 대표 당선 이후 의원들이 최 대표에게 급격히 쏠리는 듯했으나 또다시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최 대표 반대파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영남권 의원들이 큰소리치는 또 다른 이유에는 노 대통령의 계속된 실정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영남권 중진들은 노 대통령 당선 이후 긴장했던 게 사실이다. 지역에서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신당바람까지 일어 자칫 생존의 위협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최근 신당바람이 잦아들고 노 대통령 지지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자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내 신인들의 공천경쟁만 방어하면 선수를 한 번 더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이에 따라 이들 중진들은 최 대표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독자생존’이 가능하다고 판단, 지역구 관리에 주력하면서 소신행보를 하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 당선 이후 정계은퇴를 고려했던 일부 중진의원마저 최근 들어 재기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경남지역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던 2명의 중진의원이 최근 재출마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방치할 수 없고, 최 대표의 당 운영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재기명분을 세우고 있다는 것.
영남권 중진들이 조직적으로 최 대표에게 반기를 들 경우 최 대표로선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보수이미지로 수도권에서 지지기반이 약한 최 대표가 영남권과 불편하게 되면 실제 당내 지지기반을 대부분 잃게 되는 셈이다.
최 대표 측근들은 스킨십이 부족한 최 대표의 개인적 스타일 탓에 이 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보고 최 대표에게 적극적으로 의원들을 만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최 대표가 토라진 영남권 중진들을 껴안을지, 아니면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공천혁명의 명분으로 삼을지 주목된다. 어떤 선택이든 최 대표의 당내 지도력이 확고해야 가능한 선택이란 점에서 최 대표는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김영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