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 간부가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한국정책금융공사 전경. 전영기 기자
지난 1월 22일 인터넷의 한 개인 블로그에 “파행경영과 비리 주역 ○○○의 파면을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A4용지 3장 분량의 투서가 올라왔다. 자신을 ‘한국정책금융공사 조사연구실 김△△ 팀장’이라고 밝힌 이 블로거는 해당 글을 통해 정책금융공사 고위간부인 C 씨의 만행을 조목조목 고발한 직후 공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김 팀장은 이 글에서 고위간부 C 씨가 독단적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사내 파벌을 조장하고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김 팀장은 “저는 지난주 공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며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타협적인 성격 탓에 3년 동안 심각한 문란행위를 목격하고도 침묵으로 방조해왔던 많은 일들에 대해 고백하고자 한다”며 긴 글을 시작했다.
김 팀장은 “공사가 C 씨 개인의 사조직이나 다름없이 운영되고 있고, C 씨의 파행경영과 비리가 대표 정책금융기관을 지향하는 공사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김 팀장은 “공사는 출신 성분과 C 씨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성골, 진골, 육두품이 따로 있는 골품제 조직”이라며 “C 씨의 모럴 붕괴는 일부 부서장에게도 전염돼 업무추진비는 물론 각종 회의비, 야식비까지 개인 쌈짓돈처럼 쓴다”고 토로했다.
특히 김 팀장은 C 씨의 부적절한 언급들을 직접인용 부호를 통해 전하며 그를 맹비난했다. “내가 있는 한 외부 출신의 승진은 없다”, “사장도 나간다. 나한테 줄 잘 서라”, “(비(非)산업은행 출신 팀장에게) 내가 당신을 부장 시키면 사장 앞에서 나를 씹을 것 아니냐” 등의 폭언을 하며 파행 경영과 비리를 저질러 왔다는 게 김 팀장의 주장이다.
왼쪽은 조사연구실 김 아무개 팀장이 ‘파행 경영과 비리 주역의 파면을 요구한다’며 올린 장문의 글.
김 팀장이 공사 내부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꺼내 든 표현은 유명한 영화 <양들의 침묵>이었다. 김 팀장은 “안타까운 것은 이런 파행경영이 3년간 지속되면서, 많은 직원들이 문제점을 알고 있지만 혹시 인사실권자인 C 씨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벌벌 떨면서 ‘양들의 침묵’이 유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자신이 운명론에 빠져 울기만 할 뿐 스스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양들을 구원하는 ‘클라리스’의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김 팀장의 이 같은 투서는 사실 여부를 떠나 공사를 단번에 큰 혼란에 빠뜨렸고 파문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정책금융공사가 지난 2009년 10월 한국산업은행의 민영화를 위한 체제개편이 추진됨에 따라 기존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기능이 분리돼 설립된 정부 100% 출자의 공공기관이라는 점 때문이다. 특히 공사는 산은금융지주의 지분 90.3%를 가진 최대주주로서, 손자회사로 산업은행을 두고 있다. 이밖에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의 최대주주(29.94%)이며, 한국항공우주산업(KCI)도 26.4%의 지분으로 기관 최대주주다.
산업은행 민영화가 새 정부가 들어서면 더욱 불투명해질 것으로 예상되며 정책금융공사의 존립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터진 이 같은 대형 내부 고발 사건에 공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문제의 글이 올라 온 직후인 지난 1월 말 감사원에서 4~5명의 인력을 투입해 공사를 상대로 감찰 조사에 전격 착수했다. 진영욱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지난 6일 전격 임원 인사를 단행해 투서에서 비리의 당사자로 지목된 C 씨의 모든 직무와 권한을 중지시켰다.
감사원 관계자는 “정식 감사는 아니다”라며 “특별조사국에서 투서의 사실 관계 확인차 공사로 출장을 가 자료를 받아왔고, 추후 감사를 실시할지에 대해 검토·판단 중”이라고 말했다. 공사 측은 “먼저 감사원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나서 그 결과에 따라 입장 정리가 이뤄질 수 있는 문제”라며 “C 씨의 경우 인사를 담당하고 있으니 감사 중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대기발령 조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