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등의 불’ 끄다 보니 형제 집에 ‘옮겨 붙네’
▲ 차명계좌 돈이 상속재산임을 입증하기 위해 삼성 인사들이 CJ 등 형제그룹을 거론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사진은 지난 11일 특검에 재출두 하는 이건희 회장(위)과 CJ 이재현(아래 왼쪽)·신세계 이명희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제기한 삼성의 정·관계 전 방위 로비 의혹에 대해 특검팀은 김 변호사 진술 외에 이를 뒷받침할 정황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낼 가능성이 높다는 전언이다. 삼성 계열사들 차명계좌에 담긴 돈이 비자금이 아닌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산으로 밝혀질 경우 이 회장에게 조세포탈 외에 다른 혐의를 적용하기 힘들어 증거 인멸과 도주 위험이 없다는 판단하에 불구속 기소로 귀결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병철 회장의 상속재산 용처가 삼성에 국한됐겠느냐’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것은 1987년의 일. 20여 년 전 상속된 재산의 흐름을 규명하는 데 특검팀이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이병철 회장의 맏아들인 이맹희 씨 부자가 차지한 CJ나 이건희 회장 여동생 이명희 회장의 신세계에 ‘같은 성격의 자금’이 유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삼성 특검 시작 전부터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실권 문제로 삼성과 얽혀 있는 CJ가 특검 수사의 돌출변수로 등장하게 될지가 재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지난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당시 제일제당(현 CJ)을 제외한 나머지 주주들이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실권)한 바 있다. 삼성 계열사들의 실권이 이재용 전무를 최대주주로 만들어준 계기가 된 만큼 이 과정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지시 여부와 함께 범삼성가인 CJ가 실권을 하지 않은 배경 또한 관심을 끌어왔다.
한때 ‘삼성의 실권 요구에 CJ가 불응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 전무의 그룹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에버랜드 지분 장악 계획을 CJ가 외면한 셈이라 그룹경영권이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장남을 제치고 삼남인 이건희 회장에게 넘어간 과정에서 비롯된 집안 갈등 구도의 재현이란 평도 뒤따랐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당시 제일제당 대표이사였던 손경식 현 대한상의 회장은 지난 2006년 6월 에버랜드 사건 관련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이재현 회장의 외숙인 손 회장은 당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환사채 금액이 2억 9000만 원 규모로 크지 않아 실무진에서 알아서 한 것 같다”고만 밝혔지만 손 회장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진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재계 정보통들 사이에서는 특검팀의 삼성 차명계좌 수사과정에서 삼성 주장대로 상속재산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산 배분 경로를 집중 추궁했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어떻게든 차명계좌의 돈이 비자금이 아닌 상속재산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삼성 인사들의 입에서 유산의 또 다른 용처로 CJ 등과 관련 이야기가 나왔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CJ와 ‘태생적 앙금’을 갖고 있는 삼성 측이 진술과정에서 상속재산 경로와 관련 범삼성가 장자 기업을 언급해 이건희 회장에 쏠리는 의혹의 시선을 분산하려 했을 것으로 보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에버랜드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겪은 바 있는 CJ가 삼성특검 수사 종료 후 관계당국의 조사를 받을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여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이미 특검 조사과정에서 언급이 된 바 있다. 지난 2월 특검팀이 차명 의심계좌에서 이명희 회장의 계좌로 거액이 흘러간 정황을 포착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진 것이다. 당시 특검팀은 300억 원이 넘는 뭉칫돈이 이체된 사실을 확인하고 이 돈이 비자금일 가능성을 조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신세계 역시 삼성과 그다지 편한 관계는 아니다. 지난 2006년 5월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은 ‘떳떳하게 상속세를 내겠다’는 방침을 밝혔는데 그 규모가 1조 원대가 될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끈 바 있다. 이는 이건희 회장이 도피성 외유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 ‘삼성공화국’ 논란에 대한 삼성의 대국민 사과와 함께 이 회장 일가의 8000억 원 사재 출연 발표가 나온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삼성의 8000억 원 출연 발표는 곧바로 신세계의 1조 원 상속세 발표에 묻혀버렸다는 평가와 함께 삼성과 신세계 간 냉기류가 감지되기도 했다. 당시 시민단체 등이 신세계 총수 일가의 차명계좌 보유 의혹을 제기해 검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는데 재계 정보통들은 ‘삼성 측이 신세계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녀 수사의 발단이 됐다’는 보고서를 윗선에 앞 다퉈 올리기도 했다.
신세계는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삼성생명 지분 13.57%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삼성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삼성에버랜드(13.34%)의 지분율을 뛰어넘는 수치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차명주식 보유가 특검 수사 막바지를 달구는 핵심 사안이란 점에서 특검 종료 이후 신세계에 대한 관련당국의 조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4월 23일 안에 수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삼성 특검팀은 수사 막판 삼성의 범죄 혐의 외에 다른 위법 사실들을 찾아낼 경우 이를 검찰이나 국세청 등 관계당국에 넘겨줄 것으로 보인다. 특검 수사가 끝나더라도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산을 놓고 이건희 회장에게 조세포탈 혐의가 적용될 경우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병철 선대회장 유산의 용처에 대한 수사가 범삼성가로 확대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안위를 위해 차명계좌 유입금이 비자금이 아닌 상속재산임을 입증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이 회장의 조카인 이재현 회장과 여동생인 이명희 회장에게 ‘유탄’이 떨어질 계기가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