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노갑씨의 한마디 한마디가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지난 15일 구 속되는 권노갑씨.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2백억원대의 현대비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된 권 전 고문이 수사과정에서 어떤 진술을 하느냐에 따라 상당수 민주당 의원의 정치생명과 신주류가 추진중인 신당 창당의 성패가 결정된다는 뜻이 담긴 동교동계의 한 핵심인사의 말이다.
권 전 고문을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는 지난 17일 권 전 고문과 별개로 현대 비자금을 전달받은 정치인은 물론 권 전 고문을 통해 현대 비자금을 받은 정치인도 확인되는 대로 소환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권씨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돈을 받은 행위의 대가성 여부도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권 전 고문으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이 두 가지 범주로 나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범주는 권 전 고문이 건네준 돈이 현대비자금인지 사전에 인지하고 돈을 받았고 이후 현대를 위해 모종의 역할을 한 정치인들로 이들의 경우 뇌물수수 또는 알선수재 혐의가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범주는 출처를 모른 채 단순 정치자금으로 생각하고 권 전 고문으로부터 돈을 받았고 이후 현대를 위해 역할을 한 적이 없는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정치자금법을 위반하기는 했으나 공소시효(3년)가 만료돼 사법처리는 피할 수 있다.
검찰은 권 전 고문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당시만 해도 권 전 고문으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 전 고문이 지원한 돈은 정치자금일 가능성이 높고 정치자금법 위반의 경우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것이 주요 논거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 전 고문의 구속 여부가 수사의 성패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정치권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친 모험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 전 고문이 구속되기가 무섭게 검찰 입장이 ‘수사 불가’로 급선회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최근 검찰은 권 전 고문이 현대 비자금을 의원들에게 전달하는 경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돈의 성격을 정치자금으로 단정하는 것은 자칫 ‘봐주기 수사’, ‘부실 수사’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데다 유사 사건 수사와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며 진상규명 차원에서라도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의 이 같은 ‘방향선회’는 그러나 ‘권 전 고문에게 돈을 받은 정치인이 확인되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권 전 고문이 현대측으로부터 받았다는 2백억원은 전액 현금으로 추적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 단서의 충족은 전적으로 ‘권 전 고문의 입’에 달려 있다. 권 전 고문이 검찰에서 ‘돈을 주었다’고 진술하는 의원은 정치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현재 검찰 주변과 정치권에서는 권 전 고문으로부터 현대비자금을 전달받은 정치권 인사가 20여 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신주류 인사로 신당창당에 적극적인 인사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권 전 고문 등 동교동계를 구시대적 정치인으로 정치권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오는 등 정치개혁과 인적청산을 자신들의 핵심 정치 명분으로 삼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권 전 고문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날 경우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치권 내에서는 서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비판을 자제하더라도 시민단체 등의 비판은 피하기 어렵고 더구나 내년 총선에서 경쟁후보로부터 엄청난 정치공세를 받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약 권 전 고문이 ‘현대 비자금이라고 말하면서 돈을 건넸다’고 진술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 비자금이니 앞으로 현대 문제에 적극 협조하라고 부탁하면서 돈을 건넸다’고 진술할 경우 꼼짝없이 뇌물수수죄나 알선수재 혐의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수뢰사건 판례를 보면 돈을 받은 사람이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돈을 준 사람이 특정 사안을 부탁하면서 돈을 건넸다고 진술할 경우 돈을 받은 상황만 확인되면 예외 없이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간 권 전 고문은 정동영 고문을 포함, 민주당의 신주류 핵심인사들에 대해 여러 차례 섭섭한 감정을 표시해왔다. 자신으로부터 정치적 혹은 금전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풍운동’ 등을 통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 전 고문이 섭섭함을 표시하는 인사 상당수가 신주류이고 권 전 고문이 이들에 대해 진술할 경우 신주류가 추진하는 신당은 결정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신당 추진 핵심인사들의 도덕적 문제가 제기될 경우 신당의 정치적 기반은 거의 완전히 와해되기 때문이다.
권 전 고문과 정치적 교분이 두터운 한 인사는 “하반기 정국의 핵심 변수가 될 ‘권 전 고문의 선택’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현재로서는 단정적으로 예상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인사에 따르면 권 전 고문의 ‘최후 선택’은 권 전 고문이 이번 위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크게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즉 정치자금으로 인한 과거 3차례의 위기처럼 돌파할 수 있다고 판단할지 아니면 이제 정치적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할지에 따라 내놓을 ‘카드의 색깔’이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다.
권 전 고문이 ‘재기’가 가능하다고 판단할 경우 설사 현대 비자금을 받은 사실은 시인하더라도 돈을 나눠준 인사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닫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주변의 시각이다. 그래야 민주당 등 여권이 권 전 고문의 위기 돌파를 측면 지원할 것이고 정계에 복귀하면 ‘은인’으로 예우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권 전 고문이 ‘재기 불능’ 판단을 할 경우 현대비자금을 나눠준 인사들을 선별적으로 진술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선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이라면 권 전 고문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함구하겠지만 이제 사실상 김 전 대통령과 동교동계에 대해 등을 돌리려는 민주당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별적 진술’은 사법적 판단에 대한 정치권의 압력을 유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권 전 고문이 대표적 케이스 몇 건을 진술하면 권 전 고문으로부터 돈을 받았지만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정치인들이나 신당추진 세력 등이 검찰이나 사법부를 상대로 권 전 고문에 대한 처벌을 완화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권 전 고문이 수사과정에서 검찰로부터 고강도 추궁을 당하다 보면 이 같은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사실 그대로를 진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권 전 고문은 이미 정치자금 사건 등으로 3차례 구속된 전력이 있는 데다 수십 년을 야당 인사로서 정치적 탄압을 받아온 만큼 여당 체질에 익숙한 정치인이나 공무원, 그리고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기업인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게 측근들의 관측이다.
권 전 고문이 ‘궁지’에 몰릴 경우 정치적 판단과 상관없이 몇 사람에 대해서는 감정적 응어리 때문에 ‘보복 진술’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검제를 찬성하는 등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정치적 도의를 지키지 않은 인사에 대해서도 진술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권 전 고문으로서는 본인 문제가 최우선인 만큼 감정적으로 정치생명이 걸린 카드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어쨌든 동교동계 인사들은 권 전 고문의 구속이 당장은 동교동계를 포함한 구주류측에 상당한 정치적 압박이 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 자체가 DJ와 호남정서를 자극하는 성격을 띤 데다 ‘권 전 고문의 입’이라는 대 신주류 ‘압박 카드’를 쥐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 전 고문 사건이 아예 정치판 자체를 새로 짜는 계기가 될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듯 현재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의 정당 지지율은 20%대에 머물고 있고 3선 이상 의원들을 내년 총선에서 다시 찍겠다는 유권자는 10%대에 불과하다. 더구나 17대 총선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신인들의 도전이 거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신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선거 관련 법안들이 개정될 가능성도 높다.
이에 따라 동교동계는 수시로 비공식적인 모임을 갖고 향후 대책을 협의중이다. 그러나 권 전 고문이 동교동계의 ‘좌장’인 만큼 권 전 고문의 선택에 ‘감 놔라 배 놔라’할 수 없어 사실상 수사 추이만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