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콧털 건드려 신사협정 쨍그렁
▲ 삼성과 LG의 광고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사진은 LG사옥이 있는 여의나루역 삼성전자 광고(위)와 삼성의 신사옥이 있는 강남역 LG전자 광고.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삼성전자는 얼마 전 ‘명암비 100만분의 1’을 구현하는 PDP TV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경쟁사인 LG전자 측이 “그 기술은 시현이 불가능하다”며 진위를 지적하고 나섰다. 삼성전자가 ‘메가’라 불리는 100만분의 1 명암비를 구현하기 위해 상용화한 기술은 ‘셀 라이트 컨트롤’이라는 방식. 어두운 영상이 들어왔을 때 영상이 완전히 꺼지면서 순간적으로 스크린을 검은색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그런데 LG전자는 이 기술이 사실상 속임수라고 주장하는 듯한 내용의 자료를 만들어 대리점 영업사원 교육용으로 배포했다. 게다가 LG전자는 이 교육자료에서 삼성에겐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는 특검을 거론하고, TV의 디자인 개발능력도 문제 삼으며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해 삼성전자를 자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성은 당연히 발끈했다. 삼성전자 측은 “전문가들 앞에서 기술적인 실험을 명백히 시현했고 전문가들도 현장에서 두 눈으로 목격한 체험기를 블로그에 올렸다”고 강조했다. 또 “일본의 파나소닉도 이미 개발한 기술로 세계 PDP TV 시장을 주도하는 업체들이 모두 개발하고 있는데 무슨 시대에 맞지 않는 소리냐”며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전자는 이 소식을 접한 뒤 소송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소송을 제기하면 기술진위 논란이 본격적으로 점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 제품 시연회를 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삼성전자는 지난 4일 수원 디지털연구소 개발실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제품 시연회를 열었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직접 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LG는 영업사원 교육자료가 일부 부적절한 표현을 담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실제 생활환경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명암비”라는 주장을 거두지 않고 있다. LG전자 측은 “정지한 화면일 때를 나타내는 ‘실질 명암비’냐, 움직이는 화면일 때의 ‘동적 명암비’냐를 뚜렷이 밝히지 않은 채 숫자만 부각시키면 소비자들의 판단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LG전자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말하는 ‘명암비 100만분의 1’ 기술은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3만분의 1로 통하는 실질 명암비가 아니라 동적 명암비를 말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뒤 “기준과 인위적인 조건에 따라 명암비는 얼마든지 달라져 1000만분의 1까지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LG 측은 “상도의를 먼저 어긴 쪽은 삼성”이라며 “삼성이 내부 직원용 자료에 ‘LG 신제품 TV는 하체 비만’이라고 공격해 이에 대해 반격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번 갈등은 여러 면에서 ‘라이벌 의식’ 수준이던 삼성과 LG 간의 오랜 신경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삼성과 LG는 그동안 틈만 나면 상대의 약점을 거론하며 ‘흠집내기’에 열을 올려왔다. 특히 그동안 삼성보다는 LG가 다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해 왔는데, 이에 관해 재계에서는 ‘구원’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이 동양TV를 함께 경영하다가 구 회장이 동양TV를 떠나야 했던 일이나 반도체 빅딜 당시 LG반도체를 뺏긴 일 등을 삼성 탓이라고 생각하는 LG의 경쟁심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양사의 충돌은 지난 2006년 맺었던 ‘신사협정’이 사실상 깨졌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삼성과 LG의 홍보 수장들은 지난 2006년 10월 회동을 갖고 “서로 헐뜯지 말자”는 협정을 맺은 뒤 그동안 가급적 충돌을 피해왔다. 말로만 ‘사격중지’를 외친 게 아니라 당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타도 한국’을 위해 손잡은 일본과 타이완 업체들의 공동전선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군’을 형성하는 파격도 선보였다.
삼성과 LG는 지난해 5월 ‘8대 상생협력’에 합의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LG필립스LCD와 삼성SDI 4개 사가 결성한 일종의 ‘디스플레이 드림팀’이었다. 두 회사는 당시 특허를 공유하기로 하고 “상대방 제품이나 납품 선은 쓰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깼다. 이랬던 양사의 화해무드가 1년 6개월여 만에 다시 ‘교전모드’로 돌변한 셈이다.
실제로 ‘명암비 100만분의 1’논란 이후 삼성과 LG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사옥이 위치한 지하철역 광고판에 자신의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한 것. 삼성그룹 신사옥이 들어선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의 스크린 도어 등은 온통 LG 광고 일색이다. 이에 질세라 LG그룹 본사인 여의도 쌍둥이 빌딩과 연결되는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은 삼성이 점령했다.
양측은 “고의가 아니다”고 항변한다. 삼성은 “여의도 벚꽃축제를 겨냥한 것”이라고 말한다. LG는 “삼성 본사가 이전하기 전에 이미 계약해 둔 것”이라며 우연의 일치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 때마다 경쟁사 제품과 마주치는 시민들과 해당 계열사 직원들은 “묘한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