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선 칼 휘두르다 자기 몸 베일 수도
▲ 최근 현대그룹의 적극적인 경영 행보에 대한 재계의 관심이 높다. 사진은 지난 5일 ‘더블랙스위트’ 기공식에 참석한 현정은 회장. | ||
올 10월 취임 5주년을 맞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그 의지는 경영현장에서 나타났다. 지난 5일 현 회장은 현대아산 건설부문이 시공하는 양평콘도 ‘더블랙스위트’ 기공식에 참석했다. 금강산관광으로 널리 알려진 현대아산은 현재 건설부문을 강화해 종합건설회사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현 회장의 신년사, ‘사업 확대’에 제대로 부응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아산 외에 다른 계열사들은 각각의 사안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룹의 사활이 걸린 현대건설 인수전을 앞두고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는 심산인 듯싶다. 현 회장의 ‘공격경영’ 명암을 조명했다.
현대그룹 주력 계열사들이 유난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어딘가 큰 목표를 두고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는 양상이다. 그 시작은 CEO 교체작업이었다. 지난 연말 현대증권 김지완 사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났다. 뒤이어 올 1월엔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도 퇴임했다.
‘건강상 물러난다’던 김 사장은 2월 하나대투증권 사장으로 영입돼 ‘건강 문제’가 무색하게 됐다. ‘쉬고 싶다’며 사임한 것으로 알려진 노 사장도 수십억 원대 스톡옵션에 대한 ‘안전장치’로 내용증명을 보내놓고 퇴임한 사실이 <일요신문>(819호)의 최초 보도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주력 계열사 사장들이 석연찮은 이유로 그룹을 떠나면서 ‘범 현대가 내전’으로 치달을 현대건설 인수전에 대한 정지작업, 현정은 회장과의 ‘코드 불일치설’ 등이 재계에 회자됐다.
현 회장은 두 사장들의 빈자리를 ‘현대맨’도 아니고 업종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로 채웠다. 한국유리공업 부회장 출신인 김성만 현대상선 사장과 조달청장을 지낸 관료 출신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이 그들이다. 김 사장과 최 사장의 입성 전후로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은 대내외에 공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우선 김성만 사장은 현대상선의 뜨거운 감자였던 스톡옵션 문제를 건드렸다. 2003년 노정익 당시 사장 주도로 임원들에게 부여한 스톡옵션에 대해 ‘도덕적·법적 결함’ 등을 내세워 원천무효를 선언한 것. 뒤이은 이사회에서 무효화를 공식 결의했다. 전임 사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일을 법적 분쟁까지 감수하면서 뒤집은 것이다.
그 사이 현대증권은 범 현대가의 장자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과 증권업 ‘현대 간판 분쟁’을 벌였다. 현대차그룹이 신흥증권을 인수하면서 ‘HYUNDAI IB 증권’(현대IB증권)이라고 이름을 바꾸자 현대증권이 강력 반발, 법원에 가처분신청까지 내며 대응한 것. 현대차그룹 측은 한발 물러서 ‘현대차IB증권’으로 바꿨지만 현대증권 측은 이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HMC투자증권’으로 개명됐다.
간판분쟁 중 재계에선 ‘현대건설 인수전을 앞두고 현 회장 쪽이 정몽구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적당히 타협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현대증권은 그러나 증권업 선점 우위를 앞세워 현대차그룹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현대증권은 수년 전부터 노조(전국민주금융노동조합 현대증권지부·위원장 민경윤)와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다. 현재까지 현대증권 노사는 20건에 가까운 민형사상 소송·고소·고발을 주고받았을 정도다. 양쪽의 충돌은 지난 5월 30일 열린 주주총회에서도 있었다. 70만 주가량을 직접 보유한 노조를 중심으로 꾸린 소액주주운동본부가 위임장 2500만 주(지분율 약 15%)를 확보했다며 적극적으로 주총에 참여한 것.
소액주주운동본부는 이미 주주제안을 통해 현금배당 확대와 사외이사 후보를 안건으로 올린 상태. 그러나 출석주식 전산입력 장애(위임장 중복)가 생겨 하루 종일 파행된 주주총회에서 의장인 김중웅 현대증권 회장은 소액주주운동본부에 발언권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날 오후 소액주주운동본부 측 위임장 2000만 주가량이 입력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총은 속개돼 모두 이사회 안대로 가결됐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노조와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노조가 매번 주총에서 발목잡기를 하고 경영권을 건드리는 등 회사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해와 어렵다”고 밝혔다.
이런 ‘각개전투’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정은 회장은 계열사 상황에 대해 보고는 받지만 직접적인 지시는 하지 않는다”며 현 회장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부인했다. 현정은 회장도 현대차그룹과 증권사 간판분쟁 당시 “계열사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거리를 뒀다. 그룹 경영과 관련한 공식 행보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재계 일각에선 취임 5년차를 맞으며 현 회장이 경영에 자신감이 붙었고 특히 현대건설 인수전이라는 전쟁을 앞두고 ‘전투력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는 평을 내놓는다.
허나 이런 강공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당장 현대증권 주총에서 ‘소외’당한 소액주주운동본부는 주총무효소송 등을 위한 법적 절차에 들어갔다. 또 노조가 검찰에 고발한 ‘현대상선 주가조작 의혹’ 등에 대해 고발인 조사가 시작돼 수사가 본격화하고 있다. 푸대접을 받은 노조가 이 사건들에 대해서 고소 취하는 고사하고 더 강경하게 나올 것은 뻔한 일. 현대그룹 측은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간판분쟁에서 완패한 현대차그룹이 칼을 갈고 있을 수도 있다”는 현대그룹 관계자의 말처럼 ‘현대’를 쓰지 못한 현대가의 장자 정몽구 회장의 심기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여기에 HMC투자증권의 세 확장은 현대증권에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위협이다. 현대차의 전례가 있어 간판분쟁을 벌일 가능성은 적지만 최근 CJ투자증권을 사실상 인수한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그룹과도 증권업에서 한판 전쟁을 벌여야 한다.
현대상선은 김성만 사장의 단칼에 수십억 원의 스톡옵션이 날아갈 처지에 몰린 노정익 전 사장 측의 법적 대응도 방어해야 한다. “스톡옵션엔 하자가 없다”고 주장하는 노 전 사장 측은 현재 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그룹 측은 법정으로 가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지만 노 전 사장이 퇴임하며 ‘안전장치’까지 해놓은 터라 승패는 장담할 수 없다.
이런 부작용에 대해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 출신 CEO, 범 현대가, 노조 등은 좋든 싫든 비즈니스상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는 중요한 상대”라면서 “한데 현 회장은 추후 대책도 없이 강경책을 써 그룹 안팎에 감정만 쌓이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과연 현정은 회장은 공격경영의 부작용과 비판을 이겨내고 그가 신년사에서 내세운 ‘새로운 현대그룹 건설’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