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싸움에 상어는 왜 나타나
▲ 메리츠화재의 제일화재 인수 시도에 맞서 한화가 방어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 ||
김승연 한화 회장의 누나이자 제일화재 최대주주인 김영혜 씨는 지난 19일 특별관계자들의 지분율이 39.1%에서 47.18%로 증가했다며 금감원에 신고했다. ㈜화인파트너스와 한국개발금융이 한화와의 콜옵션(주식매수청구권) 계약을 통해 18일과 19일 제일화재 지분 7.47%(200만 970주)를 추가 매수했다는 것. 이로써 지난 4월 16일 메리츠종금이 제일화재 지분 4.13%를 보유했다고 공시하면서 시작된 인수전은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다.
제일화재 인수전은 막판 피델리티펀드가 메리츠화재 주식을 대거 사들여 화제를 모았다. 룩셈부르크 국적의 투자회사 피델리티펀드는 한때 메리츠증권 지분을 7% 넘게 보유할 정도로 메리츠금융그룹에 관심이 많았다. 피델리티는 지난해 7월 처음으로 메리츠증권 주식 175만 4800주(5.02%)를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한 이후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장내에서 지분을 매입, 지분율이 7.2%를 넘어섰다.
하지만 피델리티는 올해 들어 메리츠증권 주식을 한 번에 수십만 주씩, 투매에 가까우리만치 무더기로 내다 팔았다. 게다가 피델리티는 지난해 주식을 사들일 때의 가격인 주당 1만 1000~1만 6000원선에 비하면 훨씬 낮은 가격인 7000~8000원에 메리츠증권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그 결과 올해 4월 들어서는 지분율이 3%대 초반으로 떨어졌고 증권가에선 피델리티가 본격적인 ‘손털기’에 나선 것으로 봤다.
그런데 지난 6월 12일 증권선물거래소 전자공시시스템에는 뜻밖의 공시가 하나 올라왔다. 피델리티펀드가 13명의 특수관계인들과 함께 메리츠화재의 주식 624만 2120주, 총 5.04%를 사들였다는 내용이었다. 메리츠와는 결별하는 듯했던 피델리티가 사실은 물밑에서 ‘갈아타기’를 진행하고 있었던 셈. 이를 두고 증권가에서는 분분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피델리티가 메리츠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제일화재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는 메리츠화재가 의외로 대주주 지분율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파고드는 것일 수 있다는 것. 메리츠화재는 최대주주인 조정호 회장과 특수관계인이 22%의 지분을 보유 중이며, 자사주가 8% 정도로 우호지분이 30%선에 그치고 있다. 지분구성만 놓고 본다면 언제든지 적대적 M&A 위협에 노출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게다가 메리츠는 조정호 회장이 선친인 고 조중훈 회장의 유산을 놓고 친형인 조양호 회장과 등을 돌린 상태라 ‘우군’이 그리 많지 않다. 만약 공격을 받게 된다면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찮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두 번째 해석은 제일화재 인수전이 새로운 양상으로 변할 것을 감지한 피델리티가 단기 시세차익을 얻기 위해 메리츠화재 주식을 샀다는 시각이다. 이와 관련, 메리츠화재의 제일화재 인수가 사실상 무산된 것이 주가에 긍정적이라는 보고서도 나와 관심을 끈다. 한국투자증권 이철호 박윤영 애널리스트는 20일 보고서를 통해 ‘제일화재 인수를 위한 자금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긍정적이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메리츠화재 주가는 19일 종가 1만 700원에서 20일 1만 550원으로 하락했다.
사실 메리츠화재는 이번 인수전과 관련해 하나의 반전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일화재 주식을 더 사 모으기 위해 자회사인 메리츠증권을 끌어들이려 했던 것. 금융권에는 메리츠화재가 메리츠증권을 통해 2000억 원의 자금을 추가로 확보, 제일화재 주식 공개매수에 쓸 예정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금융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메리츠화재는 제일화재 대주주 변경승인을 위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문서에 이 같은 내용을 명시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메리츠증권 내부자금 500억 원에다 후순위채 발행을 통해 조달하는 1500억 원을 더한 총 2000억 원을 메리츠화재의 제일화재 인수를 위한 ‘실탄’으로 쓴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19일 한화 측의 지분 추가 확보 이전에도 메리츠 측이 보유한 제일화재 지분이 11.47%에 불과해 메리츠의 제일화재 인수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메리츠가 메리츠증권을 통해 2000억 원의 자금을 조달하려는 등 공개매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것은 무언가 다른 노림수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도 만만치 않았다.
일각에서는 메리츠증권의 메리츠화재 막판 지원을 놓고 ‘무리수’라는 분석이 나왔다. 메리츠증권의 사업규모를 감안할 때 후순위채 발행은 다소 버거울 수 있다는 지적. 메리츠증권이 메리츠화재 지원을 위해 발행할 예정이었던 후순위채는 5년 만기로, 금리가 7%라고 가정한다면 매년 105억 원의 이자가 발생하는데 이는 메리츠증권의 지난해 순이익 427억 원의 4분의 1에 달할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기 때문. 그나마 2007년은 증시호황으로 메리츠증권의 순이익이 2006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연간 순이익의 절반을 계열사 지원을 위해 발행한 채권의 이자로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메리츠증권의 후순위채 발행을 위해 결국 제3의 계열사가 또 동원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메리츠종금 등 메리츠금융그룹의 다른 계열사가 메리츠증권의 후순위채를 사들이는 방식이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런 방식은 결국 제일화재 인수 실패를 염두에 둔 ‘2중 포석’이라는 다른 해석도 있다. 메리츠증권의 후순위채를 그룹 내부에서 소화하는 것은 제일화재 인수가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채권 조기상환으로 메리츠증권의 이자부담을 해소하려는 의도라는 것.
메리츠 측이 설사 추가로 공개매수에 나서더라도 사실은 상한선을 정해 놓고 물러설 시기를 보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많았다. 일각에선 메리츠 측이 최근 금융위원회에 한화그룹의 제일화재 대주주 적격성 부분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려줄 것을 뒤늦게 요청한 것도 ‘퇴각을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 12일 열린 메리츠화재 주주총회에서 제일화재 M&A건에 대해 아무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실어주는 원인이 되고 있다.
결국 메리츠화재는 지난 24일 이사회를 열고 제일화재에 대한 M&A 시도를 실패로 결론내면서 이를 포기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따라서 금융위원회에 낸 대주주 변경 및 지분취득 승인신청도 철회하기로 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