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밥그릇 버리기…쉬울 리 없지!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전 후보의 대선 전 유세 모습. 여야는 모두 기초단체장ㆍ의원 무공천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자당(自黨)의 대선 후보가 내놓은 정치 쇄신 카드 중 하나였던 ‘기초단체장·의원 무공천’에 대해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카드를 도로 집어넣겠다는 태도로 돌변한 상황이다. 정치권에 다소 비판적인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대표적인 모범사례가 될 것”, “특권 내려놓기로 득표 전략을 짰던 여야의 전형적인 립 서비스”라며 따끔한 질책을 내놓고 있다.
일단 여야 없이 제19대 국회에 새로 입성한 초선 의원들은 입이 삐죽 나와 있다. 오는 4, 10월 재·보궐선거와 내년 6월 지방선거를 통해 ‘첫 공천권’을 휘두를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할 위기라는 것이다. 한 초선 의원은 “자기들(재선 이상)은 실컷 (특권을) 누려놓고 ‘너희는 하지 마’란 식으로 윽박지르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무공천으로 결정되면 중앙 정치는 뒤로하고 모두가 지역구로 몰려가야 할 판”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처럼 초선들이 모여 무공천 반대 기류를 형성하는 이유는 이렇다.
먼저 지역에서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은 각 지역구 행사에서 알게 모르게 지역 국회의원의 의전을 담당해 왔다. 특히 일부 구의원은 현역 국회의원 부인을 여왕(?)처럼 모시며 행사장까지 운전기사 노릇을 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국회의원과 그 가족으로선 어마어마한 혜택을 누려온 셈이다. 하지만 공천권이 사라지면 이런 풍경이 사라지게 된다. 오로지 지역민과의 스킨십만이 살길이 되고,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의 눈치를 봐야 할 판이다.
또 기초단체장·의원의 무공천이 실현되면 거기서부터 시작될 파급력이 어디에까지 미칠지가 걱정이라고 한다. 광역단체장이나 광역의원으로까지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다음 총선에서 낙천할 가능성이 크거나, 오는 지방선거에서 단체장으로 유턴하려는 전·현직 국회의원으로선 기존 단체장의 ‘현역 프리미엄’을 이길 가능성이 아주 작아진다. 그래서 기초의원은 무공천으로 하되, 기초단체장은 공천해야 한다는 ‘절반의 무공천’ 지지파들이 적지 않다.
새누리당 한 초선 의원은 “솔직히 지역구 국회의원은 기초단체장·의원을 통해 지역 민원이나 여론을 수렴하고, 기초단체장도 지역 국회의원을 통해 필요한 예산을 타내고 민원을 해결한다”면서 “그런데 서로 다른 당이거나, (그들이) 공천을 받은 데 따른 고마움이 없다면 국회의원을 나 몰라라 할 가능성이 커지고, ‘잘되면 단체장 덕, 잘못되면 의원 탓’을 할 수 있다. 그게 두렵다”고 털어놨다. 다른 의원은 “무공천은 곧 ‘갑을 관계’가 뒤바뀌게 되는 무시무시한 핵폭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재선 이상급 중진 국회의원들은 조금 다른 생각이다. 이미 선거를 통해 재선 이상이 된 만큼 지역 내 인지도나 지지도가 탄탄하고, 지역 유지나 여론주도층과의 교감이 어느 정도 이뤄졌기 때문에 기초단체장이나 기초의원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것. 초선과는 ‘무공천 이후’ 출발선이 다른 셈이다.
새누리당 한 재선 의원이 “‘새누리당은 공약을 하면 지킨다’는 생각이 유권자에게 깊숙이 박힌다면 궁극적으로 유리한 면이 훨씬 많다고 본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기초단체장·의원 무공천에 반대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은 표면적으로 “야당은 공천하는데 여당이 공천하지 않으면 여당 성향 후보들이 난립할 것이고 결국 표가 쪼개져 야당에 그 자리를 갖다 바치는 꼴이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민주당은 무공천이 대선 공약인 것은 맞지만 “아직 관련 법 개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당이 공천이라는 권리를 행하는 것이 맞다”는 논리다. 결국, 여야 모두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대선 국면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12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기초광역의원 결의대회장에서 “정당공천 폐지는 여러분께서 더 자유롭고 더 독립적으로 의정 활동을 펼치고 주민들의 뜻을 더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며 “기초의원, 단체장에 대한 정당공천으로 인해 지방정치 현장에서 중앙정치 눈치 보기와 줄 서기 등의 폐해가 발생했고, 비리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저와 새누리당은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 여러분에 대한 정당공천 폐지를 약속드렸다”고 밝혔다.
같은 달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새정치공동선언문’을 발표한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도 “과감한 정당 혁신으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며 △비대한 중앙당 권한과 기구를 축소하고 당의 분권화, 정책정당화를 추진해 국회가 생산적 정치의 중심이 되도록 한다 △공천권은 국민에게 완전히 돌려드린다 △기초의회 의원의 정당 공천제도는 폐지하되, 여성의 기초의회 진출을 확대하기 위한 비례대표제 등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앞으로 논란이 계속될 ‘기초단체장·의원 무공천’은 결국 국민과 유권자가 평가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