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 높이 들고 비판론 잠재우기
▲ 예금보험공사와 대한생명 인수를 놓고 2년 넘게 분쟁을 벌여 왔던 한화그룹이 ICC의 결정에 따라 명실상부한 대한생명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에 한화그룹의 대우조선해양 M&A도 힘을 받을 것로 예측되고 있다. | ||
이로써 한화는 2002년 대한생명 인수계약을 체결한 이후 끊임없이 불거졌던 의혹들로부터 일단은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또한 대한생명 상장을 통한 실탄 확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의 복병으로 떠올랐다. ICC 중재 이후 한화 사정을 들여다봤다.
한화와 예보의 다툼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일요신문> 735호 보도). 당시 예보는 ‘한화가 대한생명 인수를 위해 맥쿼리생명과 이면계약을 체결하고 허위 컨소시엄을 구성했다’며 ICC에 중재를 신청했다. 이와 함께 예보는 ‘한화의 콜옵션 행사(예보가 보유하고 있는 대한생명 지분 49% 중 16%를 한화가 주당 2275원에 살 수 있는 권리)도 ICC의 판결이 날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방침도 세웠다.
한화는 예보에 비해 다소 느긋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룹의 일부 임원들은 예보와의 분쟁에서 승리를 장담하기도 했다. 이는 대법원이 대한생명 인수를 진두지휘했던 김연배 한화증권 부사장에게는 뇌물 제공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고 한화와 맥쿼리생명의 이면계약도 사실임을 인정했으면서도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 자체에 대해서는 “죄를 묻기 어렵다”며 면죄부를 줬기 때문. ICC의 이번 결정도 “당연하다”는 것이 한화 측의 반응이다. 예보가 ICC에 중재를 신청할 때에도 한화는 “대법원이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판결을 내린 사안”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한화로서도 마냥 안심만 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중재에서 패한다면 대한생명 인수가 취소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룹 이미지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ICC가 예보의 신청을 받아들이면 입찰 경쟁에서 감점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간 한화는 대한생명 지분율 51%를 보유했음에도 49% 지분을 가진 예보와의 송사 때문에 경영권 행사에 제약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번 승리로 한화는 콜옵션을 행사해 지분을 추가로 늘릴 수 있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대한생명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됐다.
ICC 판결이 공개된 이후 한화 관계자는 “빠른 시일 내에 예보 측에 콜옵션 이행을 촉구할 것이며 곧 대한생명 상장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화가 예보로부터 지분 16%를 매입하면 한화의 대한생명 지분율은 67%로 올라간다. 반면 예보의 지분율은 33%로 줄어든다.
대한생명이 상장될 경우 한화는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 현재 장외주식시장에서 대한생명 주가는 약 9000원대로 추정되고 있다. 시가총액으로는 6조 원가량이다. 한화가 대한생명 지분을 주당 2275원에 매입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지분 일부를 매각하면 적어도 세 배 이상의 차익을 올리게 된다. 한화는 대한생명 지분을 33%까지 팔더라도 최대주주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만약 33%를 모두 매각할 경우 한화는 2조 원 안팎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금액은 대우조선해양 M&A의 실탄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한화는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다소 뒤처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8조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수금액을 조달하기엔 현금 보유고가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 더욱이 최근 정부가 기업 M&A를 위한 대출은 억제한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어 자체 현금 동원력이 M&A의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상태다.
하지만 대한생명 상장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경우 한화는 순식간에 자금 문제를 떨쳐버리고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할 유력한 후보로 떠오를 전망이다. 한 M&A 전문가는 “그동안 자금 여력이 풍부한 포스코가 가장 앞섰다는 게 중론이었지만 한화가 대한생명 상장을 통해 수조 원을 확보한다면 양강 구도로 재편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문제는 한화가 아무리 상장을 빨리 추진한다고 해도 내년으로 넘어갈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최근 다른 생명보험사들이 상장을 늦출 정도로 주식시장이 위축됐다는 점 또한 상장 시기의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대우조선해양 M&A의 우선협상대상자는 10월쯤 정해질 전망이다. 따라서 대한생명을 상장하기 이전에 교환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한화 측은 “M&A에서는 자금을 동원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상장 시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한화의 금융지주사 전환 속도도 탄력을 받을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대한생명을 축으로 하는 금융지주사를 설립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더욱 우세하다.
금산분리법 개정 방향이 정해지고 나서 추진해도 늦지 않을 뿐 아니라 금융지주사 전환을 위해 필요한 ‘계열사 지분 정리’ 등에는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는데 대우조선해양 M&A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만한 여력이 없을 것이란 얘기다.
증권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현행법상으로는 금융지주사 요건이 엄격해 한화 입장에서는 그다지 전환 필요성을 못 느낄 것으로 본다”라며 이를 뒷받침했다. 한화에서도 “(지주사 전환은) 아직 계획이 없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선 예보와의 분쟁에서 승리한 것이 한화에 꼭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없는 것은 아니다. ICC 최종 판결이 난 후 ‘경제개혁연대’는 “각종 특혜와 불법을 동원해 대한생명을 인수한 한화그룹이 아무런 책임도 부담하지 않고 대한생명을 가져갈 수 있게 됐다”고 비판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대한생명 인수의 문제점을 국정감사에서 지적했던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도 “불행한 일이다. 국회에서 책임소재를 다시 따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대한생명 인수를 둘러싼 의혹들이 재점화될 기미를 보이자 한화 내부에서는 ‘자칫 역풍이 부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한화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올해 한화의 최대 목표는 대우조선해양 인수와 김승연 회장 사면이다. 두 사안 모두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대한생명 문제가 다시 불거져 여론이 나빠질까 걱정이다”라고 털어놨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