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금고지기한테 ‘밑천’ 털렸나
장진호 전 회장이 95년 검찰에 소환되는 모습. 일요신문DB
장진호 전 회장의 등장은 화려했다. 장 전 회장은 지난 1988년 1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진로그룹 총수에 오른다. 그는 취임 직후 ‘기업은 성장과 발전을 하지 않으면 소멸될 뿐’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60년 전통의 주류 사업을 벗어난 ‘탈 주류’를 선언한다. 그리고 다방면으로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기업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업종에 집중하라’는 재계의 불문율을 깬 뜻밖의 외도가 진로 몰락의 서막이었다.
기존의 소주, 매실주 등을 생산 판매하는 진로를 비롯해 이듬해부터 진로종합유통, 건축업의 진로건설, 전자제조업체 진로산업, 기계의 진로인더스트리, 금융업의 우신상호신용금고, 광고업의 GTV, 진로출장연회, 진로하이리빙, 진우통신, 진로백화점 등 거의 전 사업 분야에 진출했다. 그렇게 장 전 회장의 진로그룹은 10년이 안 되는 사이에 총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순위 19위의 재벌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인수합병과 사업 확장은 그룹의 성장이 아닌 부작용을 가져왔다. 진로는 계열사들에게 출자금과 대여금 등으로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지만 이로 인해 1997년 초부터 진로그룹의 재무구조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24개 계열사 중 10여 개가 적자를 기록했다. 자기자본비율은 4.34%에 불과했고 그룹 부채 총액은 총 3조 7000억 원에 달했다.
장 전 회장은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트럭터미널과 남부터미널, 백화점 등 계열사들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추가융자도 요청해 1조 원을 빌렸다. 정부까지 진로그룹을 살리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진로그룹은 IMF 외환위기 전인 1997년 4월 부도가 났다. 이후 채권단에 의해 화의 인가 결정을 받았지만, 결국 2003년 4월 진로그룹은 재기하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장 전 회장이 오 아무개 씨를 상대로 이번에 제기한 고소 사건의 시작
은 채권단으로부터 화의 개시가 결정되고 진행 중이던 지난 2002년도다. 당시 진로그룹의 계열사들은 청산절차를 밟거나 다른 회사에 인수되는 등의 형식으로 분리되고 있었다. 진로쿠어스맥주는 OB맥주에 내주고, 진로건설은 대우조선해양이 인수했다. 진로엔지니어링은 LG그룹으로 넘어가 LG ENC로 다시 태어났고 진로발렌타인은 외국기업에 팔렸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장 전 회장은 그룹의 모체인 진로만큼은 뺏길 수 없다는 판단에 경영권을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화의 중이던 진로의 부실채권들을 사모아서 장 전 회장이 최대 채권자가 돼 법정관리 후 이를 출자전환형식을 통해 주식으로 바꿔 재집권한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장 전 회장은 개인소유였던 고려양주 주식을 담보로 150억 원의 자금을 마련하고, 금융권 차입까지 더해 897억 원을 융통해 진로의 부실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구조조정 초기에 우호적이던 골드만삭스가 진로의 흑자도산 상태를 알아채고 적대적으로 돌변해 경영권을 뺏으려는 시도를 했다”며 “기업회생 및 경영권 방어를 위해 부실채권을 매집했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장 전 회장이 법원에 제출한 고소장에 따르면 그의 재집권 프로젝트를 실행한 ‘심복’은 당시 진로그룹의 사업구조조정실 재무팀장이었던 오 아무개 씨였다고 한다. 오 씨 위로도 부사장급 임원이 있었지만 장 전 회장은 오 씨에게 직접 부실채권 매입을 지시했다. 오 씨는 H 사, C 사 등 4~5개의 차명회사를 동원해 부실채권 매입과 관리를 전담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장 전 회장도 오 씨를 믿었기에 진로가 법정관리를 거쳐서 하이트맥주에 매각된 2005년까지 5년 동안 이자수익과 거래내역 등을 보고받지 않았다고 한다.
오 씨가 액면가의 10~20%대 가격으로 부실채권 5800억 원을 사들이면서 장 전 회장의 재집권 계획은 순탄하게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2003년 9월 문제가 생겼다. 장 전 회장이 진로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황에서 5496억 원을 사기 대출받고, 비자금 75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대검찰청 공적자금비리 합동단속반에 의해 구속된 것이다. 수차례 재판 끝에 장 전 회장은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그는 다른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2005년 2월 바로 캄보디아로 도피성 출국을 한다.
장 전 회장이 매입한 채권을 직접 챙길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그를 대리했던 오 씨가 그동안 확보한 5800억 원 규모의 채권 중 4000억 원 어치를 빼돌려 제3자에게 처분했다고 장 전 회장은 주장했다. 그는 지난 1일 오 씨를 서울중앙지검에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이제 장 전 회장과 오 씨의 부실채권 관련 사건의 사실 관계는 검찰 조사와 법정 공방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이를 위해선 장 전 회장도 우선 그동안 재산반환이나 법적 대응을 하지 않은 경위에 대해 사실 규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장 전 회장의 한 지인은 “해외에 머물고 있는 장 전 회장이 최근까지 오 씨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며 “얼마 전에야 오 씨의 불법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또한 장 전 회장의 고소 내용이 사실이라면 오 씨가 빼돌린 부실채권으로 얻은 4000억 원대 거액 자금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는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이에 대해 오 씨는 횡령 혐의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피고소인 신분이 된 이상 검찰 수사에서 진로의 부실채권 매입과 대리인으로서 임의 처분과 관련해 구체적인 해명을 내놓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에 머물고 있는 장 전 회장은 이번 수사를 위해 8년 만에 귀국할 것으로 알려져 몰락한 재벌 2세의 재기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장 전 회장 화려한 해외 도피생활 캄보디아 총리 딸과 모종의 거래 96년 방한한 훈센 캄보디아 총리가 장진호 전 회장(오른쪽)이 주최한 조찬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장 전 회장은 2002년 캄보디아 국적과 찬삼락이라는 현지 이름을 취득했다고 한다. 진로그룹이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것을 감안한다면 장 전 회장은 그 전부터 해외 도피를 치밀하게 준비해왔다고 볼 수 있다. ABA은행은 지난 1996년 진로그룹에 의해 설립된 은행으로 현지에서는 ‘진로은행’으로 통했다. 그러나 이 은행은 지난 2003년 진로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채권단 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엔 ‘훈마나’(Hun Mana)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었다. 훈마나는 훈센 총리의 장녀로 캄보디아 정치권력을 비롯해 언론까지 장악하고 있어 ‘로비 대상 1순위’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훈마나가 지난 2005년 장 전 회장이 캄보디아로 오자 ABA은행 지분 50%를 장 전 회장의 이중 국적 이름인 찬삼락에게 넘기고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난다. 장 전 회장이 한국에 세금 미납액과 각종 금융 기관의 체납액, 벌금 등 수백억 원이 넘는 빚이 있었지만 아무 제약 없이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훈마나와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관계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장 전 회장은 찬삼락이라는 이름으로 ABA은행뿐만 아니라 부동산 개발회사, 경견장, 스몰카지노, 단란주점 등을 운영했다. 또한 국내 대기업과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금융브로커로 알려진 김재록 씨와 함께 소주회사를 설립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 전 회장의 아파트 건설과 소주 회사 설립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장 전 회장은 2008년 무렵 캄보디아 사업을 대부분 정리한 뒤 지난해 2월부터는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인 사장을 앞세워 게임업체 ‘이다양광’에 투자, 운영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중국에서도 게임업체뿐 아니라 현지인 법인을 통해 또다시 다양한 사업에 투자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
몰락의 길 걸은 재벌 2세들 쌍용ㆍ해태 등 닮은 꼴 추락 승승장구하던 쌍용그룹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1986년 동아자동차(쌍용자동차의 전신)를 인수하면서부터다. 초반 쌍용자동차는 코란도와 무쏘 등 지프형 자동차를 선보이면서 부상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현대, 대우, 기아자동차의 공세에 국내 시장 점유율은 점점 떨어졌다. 회사 안팎에서 자동차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김 전 회장은 오히려 1995년 쌍용그룹 대부분의 자산을 은행 담보로 잡고 4년간 3조 원에 이르는 돈을 쌍용자동차에 투자했다. 심지어 김 전 회장은 쌍용자동차의 부실로 힘들었던 와중에 1996년 민자당 소속으로 15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까지 진출한다. 그는 1997년 쌍용자동차 부실 문제가 본격화되고 외환위기까지 겹치자 이듬해인 1998년 2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쌍용그룹 회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미 쌍용그룹 계열사들의 부채가 1조 7665억 원에 달하는 등 부도 사태는 손 쓸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랐고, 결국 쌍용그룹 계열사들은 다른 기업들에 줄줄이 매각됐다. 김 전 회장의 무리한 욕심의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쌍용자동차는 대우와 중국 상하이차그룹을 거쳐 현재는 인도 마힌드라그룹에 인수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정리해고된 노동자들과 아직도 ‘쌍용차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해태그룹 역시 박건배 전 회장의 무분별한 사업 다각화로 인해 부도를 맞은 경우다. 해태그룹의 창업주인 박병규 1대 회장이 1977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당시 해태제과의 대표사장을 맡고 있던 박 전 회장이 2대 회장(당시 33세)으로 취임했다. 박 전 회장은 오너의 자리에 오르자 기존의 제과·음료·상사 등 주력 업종뿐 아니라 전자·건설·유통업 등에도 손을 대며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인켈, 나우정밀 등을 인수해 전자 통신 사업에 무리한 투자를 하고, 미진금속을 모태로 설립한 해태중공업이 적자를 면치 못해 자금난을 겪다 결국 부도가 나 해태그룹은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다. 2세 경영인이 회사 돈을 빼돌려 부도가 난 기업도 있다. 신동아그룹이 대표적이다. 신동아그룹의 최순영 전 회장은 선친인 최성모 전 회장에 이어 1976년 대한생명 대표이사 겸 신동아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1996년 수출대행업체인 신아원을 통해 무역업을 시작하면서 국내 4개 은행으로부터 수출금융 등의 명목으로 1억 8500여만 달러를 대출받아 그중 1억 6500여만 달러를 해외로 빼돌린 혐의로 지난 1999년 검찰에 구속됐다. 결국 신동아그룹은 대한생명보험이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돼 공적 자금이 투입되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그룹의 상징이었던 여의도 63빌딩은 대한생명보험을 인수한 한화그룹의 손에 넘어갔다. 이밖에도 동아 한일 새한그룹 등이 회장직을 2세 경영인에게 넘겨줬다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