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먹은 새우 ‘배탈’ 날 줄 몰랐을까
강덕수 회장이 STX팬오션을 매물로 내놓은 데 이어 STX조선해양이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하자 그룹 위기설이 돌고 있다. 일요신문 DB
지난 4월 2일 STX조선해양이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식시장에서는 STX그룹 관련주들이 일제히 하한가로 직행했다. STX의 유동성 위기가 제기된 지는 이미 오래전 일. 급기야 지난해 5월 31일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은 데 이어 자산과 계열사 매각 등 구조조정을 통해 유동성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STX를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결정타가 된 건 STX팬오션 매각 실패다. 2004년 범양상선을 인수해 설립한 STX팬오션은 STX조선해양과 함께 STX그룹의 성장을 견인한 대표 계열사다. 이를 매각하기로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그러나 강 회장은 STX팬오션 매각으로 17조 8500억 원에 달하는 그룹의 부채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될 것으로 봤다.
STX팬오션이 매물로 나온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만 해도 인수·합병(M&A) 시장의 반응은 괜찮았다. 국내 벌크선 업계 1위인 데다 국내외 인프라도 매력적이었다. 삼성SDS, 현대글로비스 등을 비롯해 국내외 투자회사들도 인수 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비공개 매각(프라이빗 딜)이 실패한 후 공개 매각마저 실패하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판에 STX조선해양마저 자율협약을 신청하자 STX그룹 전체가 위태로운 것 아니냐는 얘기가 삽시간에 퍼졌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부채 규모가 너무 크고 업황이 좋지 않은 탓으로, 이것이 현재 해운업계 현실”이라며 “업계에서는 STX가 아예 쓰러질지 모른다고 예상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은 이상 그룹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일각에서는 STX팬오션 매각 불발을 계기로 ‘애초에 STX팬오션 매각 시도는 제스처에 불과했다’는 의견이 힘을 받고 있기도 하다. 재계 고위 인사는 “산업은행이 주인이 된 후 회사를 정상화시키고 해운업계 시황이 좋아진 후 되팔려던 게 원래 계획이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실제로 지난 3월 29일 STX팬오션 매각을 위한 인수의향서 접수 마감 결과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곳이 없어 재계에서는 산업은행이 STX팬오션을 인수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인사는 또 “산은이 STX그룹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STX그룹이 쓰러지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구조조정 과정에서 감자 등의 절차를 거쳐 강덕수 회장 등 오너일가의 지분을 낮추면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너의 영향력을 그대로 둔 채 채권단이 구조조정을 진행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상에서다. 이렇게 된다면 강덕수 회장은 자칫 오너 자리를 내줘야 할지 모를 일이다.
2010년 7월 15일 전경련회장단 승지원 만찬. 아랫줄 맨 왼쪽이 강덕수 회장.
1950년 7월 5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강덕수 회장은 동대문상고와 명지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 쌍용양회에 입사, 2001년 (주)STX를 설립하기까지 줄곧 ‘쌍용맨’으로 일했다.
입사 이후 강 회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매우 부지런했다”고 말한다. 옛 쌍용그룹 출신 인사는 “쌍용중공업은 쌍용그룹 내에서 그다지 주목받는 계열사가 아니었다”며 “그럼에도 강덕수 당시 사장에 대해서는 좋은 말이 많이 들렸다”고 기억했다.
외환위기 이후 그룹이 해체되고 쌍용중공업마저 퇴출 위기에 처하자 당시 강 회장은 전 재산 20억 원을 투자, 쌍용중공업의 최대주주가 됐다. 2001년 그의 나이 51세였다. 샐러리맨이었던 강 회장은 20억 원으로 하루아침에 ‘오너’의 신분으로 상승한 것이다. 강 회장은 당시 상황을 “회사를 살리는 게 급선무였다”며 “처음부터 오너가 될 작정은 아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쌍용중공업 인수 후 강 회장은 사명을 STX로 변경했다. 2001년 5월에는 STX엔파코, STX조선해양과 함께 마침내 STX그룹을 출범시켰다. 그룹 출범 후 강 회장은 M&A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이는 강 회장의 성장전략이기도 했다. 2001년 10월 대동조선(현 STX조선해양)을 인수한 강 회장은 2002년 산단에너지(산업단지관리공단, 현 STX에너지), 2004년 범양상선(STX팬오션), 2007년 아커야즈(STX유럽)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2000년대 국내 M&A 시장의 핵으로 등장했다.
2009년 무역의날 포상 전수식.
STX그룹이 한창 성장하던 시절, M&A업계에서는 강 회장의 M&A 전략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차입으로 회사를 인수했지만 이 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시켜 자금을 끌어 모은 후 차입을 해소하고 이익구조를 개선시켜 왔다는 것. 대동조선 인수(현 STX조선해양)가 좋은 예다. 2001년 10월 1000억 원의 차입금으로 대동조선을 인수한 강 회장은 이를 상장시켜 2년에 걸쳐 1100억 원어치 주식을 매각, 100억 원을 남겼다. 앞서의 옛 쌍용 출신 인사는 “쌍용시절 재무통으로 통하던 강 회장은 은행들과 사이가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며 “거드름 피우지 않고 은행들을 꽤 겸손하게 대한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2004년 범양상선(현 STX팬오션) 인수 때는 ‘무리한 인수’라는 평가가 많았다. 2004년 5월 인천정유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신 강 회장은 11월 주당 2만 2000원에 범양상선 지분 67%를 매입(약 4400억 원)했다.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고 해석했다. 당시 범양상선 매출은 1조 9000억 원으로 STX그룹 총매출액인 1조 5000억 원보다 많았다.
범양상선은 2년 연속 흑자에다 영업이익 778억 원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자체 선박 57척, 용선 200여 척을 보유하고 있는 ‘알짜’였다. 비록 무리한 인수라는 평가를 들었지만 때마침 불붙기 시작하던 조선·해운의 최대 호황을 맞으면서 조선과 해운이라는 양 날개를 단 STX는 비상하듯 성장해갔다.
M&A업계 관계자는 “이때까지만 해도 강 회장의 전략은 성공했고 운도 따랐다”며 “그러나 이후가 문제였는데 결국 과욕이 화를 부른 셈”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앞의 해운업계 관계자는 “조선·해운업은 경기에 굉장히 민감한 업종이기에 항상 불황일 때를 대비해야 한다”며 “호황기 벌어들인 돈으로 불황을 견뎠어야 했는데 강 회장은 그 돈을 사세 확장에 ‘올인’한 것이 문제”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 기업 중엔 무리한 M&A로 사세를 확장하다 쓰러진 기업들을 여럿 볼 수 있다. 대우그룹, 거평그룹이 그렇고 C&그룹이 그러하며 가깝게는 웅진그룹이 이에 해당한다. 최근 STX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들 기업의 전철을 밟는 징후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10년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악수하는 강덕수 회장.
강 회장의 패착은 2007년 노르웨이 아커야즈(현 STX유럽) 인수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세계 최대 크루즈선사인 아커야즈 인수대금은 무려 1조 4000억 원. STX는 아커야즈 인수로 2006년 7조 5000억 원이던 매출이 2007년 17조 3000억 원으로 껑충 뛰었지만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2007년 3월 중국 다롄에 종합생산기지를 착공한 것도 앞을 내다보지 못한 ‘무리수’였다. 장사는 안 되기 시작하는데 시설을 늘리고 무리한 투자를 계속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조선·해운업 불황이 잇달아 들이닥치면서 강 회장은 사세 확장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에너지사업으로 돌리면서 조선·해운업 불황을 극복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태양광사업 등 에너지사업에 진출한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사업을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하는 판국이었다. 강 회장은 2009년 11월 “조선·해운산업의 호황이 가까운 미래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며 “지금은 있는 것을 잘 관리하고 키울 때”라는 말로 재무건전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해운업계 고위 인사는 “STX의 가장 큰 문제는 벌크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라며 “사업 포트폴리오가 다양하면 불황에도 그나마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평가는 조선과 해운에 치우쳐 있는 그룹 전체 사업 포트폴리오와도 연결된다.
강 회장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강 회장은 에너지, 건설 등의 분야에 진출하면서 조선과 해운 중심에서 벗어나고 신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유동성 위기가 발목을 잡으면서 신성장동력 발굴이 쉽지 않았다. 결국 그룹의 양대 축인 STX조선해양의 자율협약과 STX팬오션의 매각 실패로 강덕수 회장과 STX그룹의 위기는 구체화됐다.
STX그룹 측은 워크아웃이 아닌 자율협약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룹이 쓰러지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강덕수 회장 또한 여전히 회장으로서, 오너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2009년 올해의 경영자상 수상. 일요신문 DB
자율협약 상태에서는 비록 해당 기업과 오너에게 구조조정과 경영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권을 주지만 ‘사실상 채권단이 마음대로 한다고 보는 게 맞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자율협약을 겪어본 재계 관계자는 “채권단의 신탁통치로 보면 알기 쉽다”고 잘라 말했다. 채권단이 해당 기업에 상주하면서 재무적 관리는 물론 경영상 중요 사안에 대해 일일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비용이 지출되는 일에는 채권단의 결재가 필요하다”며 “수시로 지표를 관리할 뿐 아니라 의사결정 단계에서도 꼭 채권단과 협의해야 한다”고 전했다. 반면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비록 중요 사안에 대해서는 채권단이 개입하지만 워크아웃보다는 나은 조치이며 가능성이 보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STX팬오션 매각 실패에 이은 STX조선해양의 자율협약 신청으로 강덕수 회장은 최대 위기에 몰렸다. 지난 4월 1일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STX는 21개 계열사에 자산 24조 3000억 원으로 재계 순위 13위(공기업 제외)에 올라 있다. 2001년 20억 원으로 시작해 12년 만의 결과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강 회장의 힘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계열사 수가 지난해 26개에서 21개로 줄어들었다. 10대그룹처럼 ‘몸집 줄이기’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 우려스러운 징후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