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채권단’ 응급처치 발동동
강덕수 회장이 그룹 출범 12년 만에 사상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1973년 쌍용양회에서 사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강 회장은 2000년 말 자신이 몸담고 있던 쌍용중공업(현 (주)STX)이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사재 20억 원을 털어 이 회사를 전격 인수하면서 오너로서의 새 길을 걷게 된다. 그는 2001년 대동조선(현 STX조선해양) 인수를 시작으로 2002년 산업단지관리공단(현 STX에너지), 2004년 범양상선(현 STX팬오션) 등을 차례로 인수하는 한편, STX중공업 등을 신규 설립하며 단기간에 STX그룹을 재계 10위권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지나친 몸집 부풀리기와 조선·해운 중심의 수직 계열화된 기업 구조 탓에 세계적 경기침체로 인한 업황 장기 불황의 직격탄을 맞아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하며 경영권마저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지난 4월 1일 기준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24조 3000억 원의 자산총액을 기록하며 재계 13위(공기업 제외)의 기업집단 STX그룹의 오너 강 회장이 이제는 채권단의 결정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태로 내몰리게 된 것.
올해 3월 말 기준 금융권의 STX그룹 전체에 대한 여신 총액은 13조 1910억 원에 달한다. 주요 계열사의 회사채 가운데 올해 안에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는 9800억 원에 이르고, 내년에는 1조 3000억 원이다. 이 같은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강 회장은 유동성 확보를 위해 지난해 말부터 주력 계열사인 STX팬오션 매각을 추진하고 있으나 실패하면서, 주채권 은행인 산업은행으로의 피인수가 유력한 상황이다.
이어 지난 4월에는 STX조선해양이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었고, STX건설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지난 3일에는 추가로 (주)STX, STX엔진, STX중공업, STX포스텍이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STX그룹은 이를 통해 그룹의 4대 사업 분야인 조선, 해운, 에너지, 건설 중 핵심인 조선 사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매각하는 식의 구조조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STX그룹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채권단의 자율협약 수용 여부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지난 7일 다른 채권은행들에 (주)STX, STX엔진, STX중공업에 대한 자율협약 동의 여부 문건을 발송했다. 13일까지 이들 회사들에 대한 자율협약에 동의할지 여부를 결정해 달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주)STX는 14일 만기 도래하는 2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막기 위해서라도 자율협약을 통한 채권단의 자금 지원이 절실하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13일께까지 채권단에 자율협약 동의 여부를 결정해 달라는 문서를 발송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주)STX가 2000억 원의 회사채를 14일까지 막지 못하면 연체가 발생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채권단에서는 STX엔진 및 STX중공업과는 달리 (주)STX와 STX포스텍의 자율협약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기류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관계자는 “중공업과 엔진의 경우 ‘국가 기간산업 수호’라는 측면에서 지원의 명분이 있지만, 지주회사 성격의 (주)STX와 지배구조상 이 회사의 위쪽에 위치하는 포스텍의 경우 명분이 부족해 보인다”며 “강 회장의 그룹 지배권과 관련이 있는 (주)STX와 포스텍의 경우 STX그룹이 명확한 자금 마련 계획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자율협약이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런 점에서 STX그룹으로서는 최근 소송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주)STX와 일본 오릭스 간 STX에너지 지분 매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논란의 발단은 지난 4월 말 일본의 종합금융회사인 오릭스코퍼레이션이 STX에너지의 최대주주로 올라서면서부터다. STX그룹은 지난해 10월 오릭스 측으로부터 3600억 원의 자금을 유치하면서 (주)STX의 STX에너지 지분 43.15%를 매각했다. 여기에는 오릭스가 (주)STX의 보유 지분 6.95%를 추가로 가져올 수 있는 교환사채(EB)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오릭스가 지난 4월 23일 교환사채를 통해 추가로 6.95%의 지분을 확대하며 총 50.1%의 지분을 가진 최대주주로 등극, 계열분리를 요구했다. 경영권에 위협을 느낀 강 회장은 이 6.95%를 되사올 수 있는 권리인 콜옵션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지난 1일 오릭스 측에 전달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증폭됐다. 곧바로 (주)STX는 국내 사모펀드(PEF)인 한앤컴퍼니와 지분 43.15%와 강 회장이 콜옵션을 행사해 되찾을 지분 6.95%의 의결권을 매각하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지난해 (주)STX가 오릭스와 지분 매각 계약 당시 계약 내용의 해석과 관련해 법적 공방이 예상되는 상황. STX가 한앤컴퍼니에 지분 매각을 통해 수천억 원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STX 관계자는 “지난해 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어 자금 유치가 절실한 상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독소조항까지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안”이라며 “현재로선 오릭스 측과 STX에너지 매각에 대한 논란을 먼저 해소한 후에, 한앤컴퍼니와 매각을 위한 정식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채권단 측에서는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계열사 분리 매각 등을 통한 그룹 해체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강덕수 회장 측이 희망하는 최상의 해결책은 ‘금호아시아나 식’ 회생 시나리오다. 자신의 주식을 담보로 채권단과의 자율협약 과정에서도 위임을 통해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주요 계열사의 실적이 개선되면서 금호산업 유상증자 기회를 잡아 경영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를 의식한 듯 STX그룹 강 회장도 채권단 지원을 전제로 자신의 보유 주식 전부를 채권단에 맡기는 ‘백의종군’의 뜻을 밝혔지만, 단순 비교는 어렵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STX 관계자는 “채권단의 처분을 기다리는 입장으로서 섣불리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채권단에서도 강 회장의 경영권 보장과 관련해서는 긍정적 시그널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금호아시아나의 사례가 우리로선 최상의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상당한 양의 사재를 바탕으로 경영권을 회복한 박삼구 회장과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며 “우선 채권단의 도움을 받아 현 위기를 넘기고 업황이 좋아질 때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고 덧붙였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