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값에 사서 아들 주머니로 ‘쏘옥’
▲ 왼쪽부터 한진가 조원태 상무, 효성가 조현문 부사장, 두산가 박지원 사장. | ||
구본무 LG그룹 회장 양자 구광모 씨(31)는 지난 10월 27일 ㈜LG 지분 9만 4000주를 매입했다. ㈜LG 지분율을 종전의 4.48%에서 4.53%로 끌어올려 구본무 회장(10.51%)과 구본준 LG상사 대표(7.58%), 그리고 생부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5.01%)에 이은 4대 주주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됐다.
같은 날 LG가 방계인사들은 구광모 씨 매입 지분과 비슷한 물량을 내놓았다. 구본무 회장 외사촌 동생인 이선용 전 푸드스타 사장을 비롯한 방계인사 세 명이 11만 3000주를 장내 매도한 것이다. 10월 27일 ㈜LG 주가는 3만 6000원으로 지난해 5월 중순 이후 최저가였다. 구광모 씨가 이번 지분 매입을 위해 들인 금액은 약 34억 원.
구광모 씨가 이에 앞서 지난 8월 27일 ㈜LG 지분 5만 5000주를 매입하는 데 약 35억 원이 들어간 것과 비교해 보면 비슷한 금액으로 두 배 가까운 지분을 늘릴 수 있었다. 구광모 씨 지분율을 하락장세 속에서 용이하게 올려주기 위해 방계인사들이 헐값에 지분을 내놓아야 했던 것으로 관측된다.
이 같은 현상은 최근 한진가 3세들의 핵심 계열사 지분 매집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상무와 장녀 조현아 상무, 차녀 조현민 과장은 지난 10월 15일부터 10월 29일까지 총 여덟 차례에 걸쳐 대한항공 주식을 각각 3만 6900주 사들였다. 10월 중순부터 3만 원 대로 하락한 대한항공 주가는 이후로도 하강곡선을 그리며 10월 말 한때 2만 원대까지 떨어졌다가 11월 들어 3만 원대를 회복한 상태다.
하락장세에서 조 회장 자녀들이 지분을 사들이는 동안 조 회장 동생인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미망인 최은영 회장과 자녀들은 반대로 대한항공 지분을 내다 팔았다. 10월 22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매각한 주식은 총 12만 9000여 주. 10월 24일은 전날까지 3만 원대를 지키던 대한항공 주가가 2만 8250원으로 2만 원대로 떨어진 날이다. 조 회장 자녀들이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지분을 사들이는 동안 최 회장 일가는 주가가 바닥을 칠 때 매각한 셈이다.
한편 조 회장 자녀들의 대한항공 지분 매집량이 동일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조원태 상무는 얼마 전 대한항공 핵심보직이랄 수 있는 여객사업본부 부본부장직을 맡고 한덱스(옛 신세계드림익스프레스) 인수전을 주도하면서 후계구도에 다가선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핵심계열사 지분증가율에서 누나인 조현아 상무는 물론 여동생인 조현민 과장과 비슷한 진척 상황을 보여 한진의 후계구도를 아직 단정할 수 없다는 해석을 낳기도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기업인 효성가에선 하락장 속에 차남과 삼남이 장남의 지분율에 근접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조석래 효성 회장의 차남 조현문 부사장은 10월 한 달 동안 세 차례에 걸쳐 ㈜효성 지분 12만 8370주를 사들였다. 이로써 지분율을 6.93%까지 끌어올린 상태. 하락장세 속에서 6.94%를 보유한 장남 조현준 사장에 불과 3000여 주 차이까지 접근한 것이다.
조 부사장이 지분을 사들인 기간은 ㈜효성 주가가 4만 원대에서 3만 원대로 미끄러지던 시점이었다. 9월 중순까지만 해도 7만 원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반값에 지분을 확보했다고도 볼 수 있는 셈. 같은 기간 동안 삼남 조현상 전무도 5만 3000여 주를 사들여 ㈜효성 지분율을 종전의 6.55%에서 6.70%까지 올렸다.
장남 조현준 사장은 영역 확대에 공을 들였다. 조 사장이 최대주주인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는 지난달 연예기획사 나무액터스와 꽃엔터테인먼트를 보유하고 있는 크레스트인베스트먼트를 합병했다. 11월 들어선 조 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효성ITX가 휴대폰 키패드 생산업체 소림 지분 55.9%를 전격 인수했고 조 사장이 지분 80%를 보유한 트리니티에셋매니지먼트는 IB스포츠의 104억 원 규모 유상증자에 참여했다. 조 사장은 기존의 IT회사 합병작업에 이어 연예·스포츠 분야까지 활동 폭을 넓히고 있는 셈이다.
하락장세 속에 효성가의 ‘젖먹이 주주’ 탄생도 관심을 끌었다. 조석래 회장의 손자들인 인영(6), 재호 군(2)이 각각 3710주, 인서 군(2)이 3910주를 취득한 것이다.
두산가에선 총수일가 3세 맏형 박정원 두산건설 부회장(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과 차남 박지원 두산중공업 사장이 하락장세 속에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며 4세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리고 있다.
수년간 지속적인 ㈜두산 지분 확보를 통해 지분율 4.15%로 박용곤 명예회장(3.52%)을 앞지른 박정원 부회장은 지난 9월 말 보유지분이 없던 두산중공업 주식 1100주를 사들였다. 두산중공업 주식 2000주를 보유하고 있던 박지원 사장도 11월 들어 2000주를 신규 취득했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장남 현승담 동양메이저 차장도 10월 말 세 차례에 걸쳐 1만 2000여 주를 사들였다. 지난해 동양메이저 구매팀으로 입사한 현 차장은 올 6월에도 동양메이저 주식 1만 5000여 주를 매입하면서 현 회장의 후계구도가 구체화되고 있다는 관측을 낳기도 했다. 주식 한파가 재벌가에서는 지배구조를 흔드는 바람인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