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뜬 ‘이별 비용’계산 중?
▲ 민유성 산업은행장(왼쪽) 김승연 한화 회장 | ||
치킨게임은 차 두 대가 마주보고 달리다가 먼저 핸들을 꺾는 쪽이 겁쟁이(치킨)가 돼 지는 게임. 지는 쪽은 치명타를 입고 둘 다 버틸 경우엔 파국뿐이다. 여기에 대우조선해양노동조합(노조·위원장 최창식)과 몇몇 시민단체가 “원칙과 책임 있는 매각”을 촉구하며 한화를 비난하고 있어 김승연 회장의 고민은 더욱 깊다. 파국으로 내몰리고 있는 한화와 산은이 1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어떤 카드를 내밀지 재계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발표한 신년사 중 일부다. 재계에서는 이를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인수 의지인 동시에 현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한화는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됐던 자금 문제에 결국 발목이 잡혀 인수 마무리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한화는 지난 12월 26일 이사회를 열어 인수대금 납부유예와 가격인하 등을 핵심으로 하는 요구사항을 산업은행 측에 전달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그룹 안팎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인수를 밀어붙였던 김 회장에 대해 사내외 이사들의 질타가 쏟아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틀 뒤인 12월 28일 산업은행은 한화의 요구를 거절했다. 오히려 ‘예정된 3월 31일까지 모든 잔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다만 본계약 체결을 1개월 연장해주는 것으로 타협의 여지는 남겼다.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본계약을 미뤄준 것은 현실 가능한 자금 조달 계획을 세워 인수에 진정성을 보이라는 의미다. 그렇지 않을 경우 ‘판’은 깨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영진M&A연구소의 김영진 소장은 “본계약이 이뤄지더라도 추가협상에서 가격 차이를 이유로 M&A가 무산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한화가 남은 기한 내에 자금을 마련할 방법은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산업은행도 한화의 가격인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지금 업계에 도는 말들을 종합해보면 양측이 이행보증금 3000억 원을 둘러싸고 펼쳐질 법적 싸움에 대비해 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산업은행이 한화 측의 ‘구원투수’로 나설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정인성 산업은행 부행장은 기자회견에서 “수용 가능한 가격 및 조건으로 한화가 보유한 자산을 매입해 한화컨소시엄의 자체 자금 조달에 협조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도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산업은행은 한화가 매물로 내놓은 부동산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갤러리아백화점 한화리조트 등 우량 계열사 지분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화는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그럴 순 없다’며 반발했다는 전언이다.
산업은행의 최후통첩을 받은 한화는 일단 추가 협상을 통해 ‘최대한 양보를 끌어낸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을 담당했던 실무진에서는 이미 김 회장 지시로 ‘인수 포기 후 상황’에 대한 대책도 은밀히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의 한 관계자는 “인수를 끝까지 추진한다는 생각엔 변함없지만 산업은행과의 협상이 원활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럴 경우를 대비해 회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라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일단 한화는 대우조선해양 노조의 정밀실사 거부와 최악의 경기침체에 따른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최대한 부각시킬 방침이라고 한다. 유사시 ‘인수포기는 불가피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특히 귀책사유에 따라 이행보증금 3000억 원의 행방이 가려지기 때문에 한화는 최대한 피해자임을 부각시킬 것으로 보인다.
한화가 이처럼 ‘포기’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은 자금조달 차질, ‘승자의 저주’에 대한 주위의 우려, 조선업 경기 악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일각에서는 산업은행과의 협상용 카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수가 무산될 경우 6조 원이 넘는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할 또 다른 기업이 쉽게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커 산업은행이 부담을 느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실 산업은행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매각이 무산될 경우 주간사로서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한화의 생각처럼 지금과 같은 경기 상황에서 대우조선해양을 가져갈 기업이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시가총액이 폭락한 대우조선해양의 인수가격은 하락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한화에 양보만 해줄 수도 없는 것이 산업은행의 입장이다.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은 올해 M&A가 실시될 것으로 보이는 현대건설(14.66%)과 하이닉스(7.1%)의 주주이기도 하다. 모두 대우조선해양 못지않은 대형 매물들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이번에 확실히 매듭을 짓지 못하고 지지부진할 경우 차후 M&A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산업은행이 모를 리 없다. 금융권 사정에 밝은 한 정보 관계자는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M&A를 생각하면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에 붙들려 있을 순 없다. 한화와의 협상이 결렬될 경우 매각대금이 낮아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주인을 찾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자산관리공사가 쌍용건설 M&A의 우선협상대상자였던 동국제강의 인수대금 인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을 거론하며 산업은행이 형평성 때문에라도 한화의 제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산업은행 관계자도 “한화가 인수하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겠지만 결코 끌려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인수가) 취소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고 그럴 경우 재인수전은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는 산업은행이 인수 무산 이후의 방안을 수립해놓고 있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이와 관련, 지난 성탄절을 전후해 산업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가 몇몇 대기업 CEO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끈다. 산업은행이 새로운 인수 후보자들을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은행은 한화 측에도 이러한 뜻을 이미 전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노조와 시민단체들도 산업은행을 압박하고 나섰다. 노조는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칙과 책임 있는 매각을 진행하라’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노조 관계자는 “한화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다. 매각 성사에 부담을 가지고 있는 산업은행이 여기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관계자도 “지금 이 상황에서 (대우조선해양이) 한화에 넘어갈 경우 그 부실 책임은 우리가 떠안을 것으로 본다. 그동안 인수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는데 아예 한화의 인수를 거부하자는 의견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시민단체인 투기자본감시센터는 ‘한화는 진정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며 한화를 비난하는 한편 산업은행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고 나섰다. 투기자본감시센터 관계자는 “그렇게 자신하던 김승연 회장이 지금은 매각주간사인 산업은행에 돈을 빌려달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이런 재벌을 어떻게 믿고 한국의 대표적인 조선사를 맡길 수 있느냐”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