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죽 쑤자 ‘후계구도’ 흔들
이재용 정의선 신동빈…. 재계의 대표적인 차세대 경영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계자라는 것. 이밖에도 국내 대부분의 오너들은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것을 당연시 한다. 하지만 동국제강은 여기서 예외로 분류돼왔다. 장세주 회장의 동생 장세욱 부사장이 경영권 승계 영순위로 꼽혀왔기 때문이다.
현재 장 부사장의 공식 직함은 전략경영실장. 그룹 핵심부의 수장을 맡아 형을 보좌하고 있는 것이다. 장 회장이 경영총괄·대외협력 같은 업무를 맡고 장 부사장은 구체적인 사업계획의 수립 및 실행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그룹 내부의 살림살이도 장 부사장이 직접 챙기고 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대통령 장세주, 국무총리 장세욱’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룹의 핵 동국제강 지분을 살펴봐도 장 부사장은 10.21%를 보유하고 있어 장 회장(15.26%)과 JFE스틸코퍼레이션(14.88%)에 이어 3대주주에 올라 있다. 적어도 그룹 내에서는 명실상부한 2인자인 것이다. 장 회장 역시 동생인 장 부사장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 한 번 맡긴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한다. 장 부사장이 ‘포스트 장세주’로 평가받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장 부사장은 인수·합병(M&A)에 관한 한 전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철강사업 호황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던 2004년경부터 장 회장이 사업 확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장 부사장이 포항제강소에서 전략경영실로 올라온 것도 그 즈음이다. 장 부사장에게 M&A 특명을 내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장 부사장은 외부의 M&A 전문가 영입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장 부사장은 전략경영실에 입성한 지 1년여 만에 첫 작품을 내놨다. 2005년 7월 휴대폰용 부품을 제조하는 DK유아이엘(옛 유일전자)을 인수한 것이다. 동국제강은 880억 원가량을 들여 DK유아이엘 지분 28.7%를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철강업체의 전자부품 제조업체 인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에 대해 동국제강은 “철강과 물류 중심에서 정보통신산업을 그룹의 성장 동력으로 삼을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이후 DK유아이엘의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2004년 약 2180억 원이던 매출액은 동국제강에 인수된 2005년 1880억 원으로 하락하더니 2007년 1800억 원으로 떨어졌다. 영업이익 역시 같은 기간 360억 원가량에서 79억 원으로 감소했다. 15%를 넘기던 시장점유율도 현재 7~8%를 오가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IT분야에 관심이 커 DK유아이엘 인수를 직접 지휘했고 현재 이 회사 이사를 겸직하고 있는 장 부사장으로서는 내심 속이 쓰릴 듯하다.
절치부심하던 장 부사장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쌍용건설 인수전에 참여해 지난해 7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2004년 워크아웃을 졸업한 이후 우량 건설사로 거듭난 쌍용건설 인수로 장 부사장은 다시 날개를 다는 듯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와 건설경기 침체로 인해 동국제강은 쌍용건설 인수를 포기했고 자산관리공사는 동국제강의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박탈했다.
인수 무산으로 동국제강은 이행보증금 231억 원만 날릴 가능성이 커졌다. 재계에서는 동국제강이 써낸 입찰 금액이 ‘지나치게 높았다’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돈뿐만이 아니다. M&A 과정에서 불거졌던 쌍용건설 우리사주조합과의 마찰과 이행보증금을 염두에 둔 말 바꾸기 등도 비난받아 그룹 이미지도 깎였다.
김영진M&A연구소 김영진 소장은 “애초에 M&A전략이 잘못됐던 것 같다. 외국의 경우 이런 일이 발생하면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경영진에 대해 주주들 소송이 잇따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금 동국제강의 몇몇 소액주주들은 이행보증금 지불을 기정사실로 보고 배임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장 부사장이 주도했던 M&A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실패로 돌아가자 장 부사장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장 부사장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장 부사장이 DK유아이엘이나 쌍용건설을 인수하려 할 때 회사 내부에서는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2005년부터 2조 원 이상이 소요되는 해외사업 ‘브라질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어 현금을 다른 곳에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쌍용건설의 경우 건설경기 침체를 예상할 수 있는 시점이어서 반대는 더욱 격렬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장 부사장은 밀어붙였고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장 부사장이 주춤하고 있는 사이 그룹 안팎에선 장 회장 장남 선익 씨(29)가 새로운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선익 씨가 재계에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 2006년 동국제강 신입사원 연수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당시엔 나이도 어리고 장 부사장 입지가 워낙 공고해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최근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김승연 한화 회장이 29세에 그룹을 물려받은 것을 감안하면 선익 씨 나이가 아주 적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도 나온다.
물론 여전히 장 부사장이 가장 강력한 ‘대권’ 후보임에는 틀림없다. 동국제강 지분도 선익 씨가 0.24%를 가지고 있어 장 부사장에 한참 못 미친다. 장 부사장이 전략경영실장으로서 쌓아온 인프라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것은 최대주주이자 최고경영자인 장 회장 마음먹기에 따라 선익 씨가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것들이다.
동국제강에서는 “경영권 승계를 얘기하기엔 너무 이르다. 선익 씨는 회사에 있지도 않다”라고 말한다. 현재 장 회장 나이가 57세이니 이해가 갈 법도 하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후계를 준비하지 않을 수도 없는 나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벌써부터 삼촌-조카 간의 대결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M&A 실패로 장 부사장의 ‘무혈입성’은 힘들어졌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향후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을 것으로 보이는 선익 씨와 경쟁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